지난 주는 이산가족 만남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한반도를 휩쓸었다.
남북으로 헤어져 생사조차 모르던 부모형제가 서로 부여잡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과거 50년 간 남과 북은 대결로만 치달았다. 한민족이면서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이제 이산 가족들이 만나는 광경을 보면서 남과 북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함께 잘 살다가 통일을 이루냐는 게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텐데 그 길 역시 멀고 험해 보인다. 그 험한 길에 도움이 될 지혜를 바둑에서 한 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
바둑은 기본적으로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다. 상대를 무지막지하게 눌러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마음을 약하게 먹으면 지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바둑에서도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때가 있다. 비기는 경우다.
현대에는 비기는 경우를 없애려고 덤이란 제도를 만들어 가상의 반집을 계산한다. 비김을 원천적으로 방지한 셈이다. 그럼에도 비기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3패'나 '4패'가 나왔을 때다. 이럴 땐 반상에서 해결이 불가능하므로 비긴 것으로 처리한다. 그런데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장생'이다.
장생은 기본적으로 사활이 걸렸을 때 발생한다. 돌을 잡느냐 못 잡느냐 할 때 장생이라는 기묘한 형태가 나온다. 패와 비슷하지만 패처럼 상대 돌을 한 점만 들어내는 것이 아니기에 무한히 반복되어도 착수금지 규정에 해당하지 않는다.
장생은 지금까지 이론으로만 존재했다. 책에서나 구경 할 수 있었지 실전보로 남은 기보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기기묘묘한 장생이 실전에 한번 등장했다.
1993년 일본 혼인보전 리그에서였다. 대국자는 린 하이펑 9단과 고마쓰 히데끼 8단. 바둑역사에 전무한 형국이 실전에 등장한 것이다.
장생의 모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둑이란 게임의 오묘함에 저절로 감탄한다. 단지 기이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형이 반복되는 그 모양은 바둑의 궁극이 어디인가 하는 철학적인 의문까지 불러일으킨다. 누가 만들어 붙였는지는 몰라도 바둑에서 장생이란 단어가 주는 여운은 그 형태의 진기함과 참 아름답게 어울린다.
장생은 '오래 산다' 라는 뜻이겠지만 실제 모양을 보면 '함께 어울려 산다'는 의미가 더 강해 보인다. 잡으려던 상대 말을 잡지 못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데서 바둑이 주는 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한다.
50년만에 잠깐 만난 이산 가족들이 다시 남과 북으로 헤어져 각자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원해 보면서 바둑의 장생이 한반도에서 멋지게 펼쳐졌으면 한다.
김대현 momi21@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