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를 몰다 갑자기 시동이 꺼진다면? 차를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요즘 차는 주행중 시동이 꺼지면 브레이크가 듣지 않고 핸들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 다음일은?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약간 속도가 있었다면 '사망 아니면 중상이다'
요즘 새로 나온 기아 자동차의 카렌스 2000di가 이런 말썽을 자주 일으킨다.
"시도때도 없이 시동이 꺼지더라"
경남 진주에 사는 고정택씨의 카렌스도 지난 7월 22일 이런 말썽을 부렸다.
그날 고씨는 경남 사천에서 삼천포쪽으로 국도를 시속 70Km로 달리다 커브길에서 시동이 꺼지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핸들은 꼼짝을 않고 브레이크도 듣지 않고...
차는 이미 중앙선을 넘었지만 고씨는 침착하게 시동을 다시 걸고 자기 차선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없었고 극히 침작하게 대응을 했기 때문에 사고는 면할 수 있었지만 고씨는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등골이 써늘하다.
정비업소에 입고된 카렌스2000di에 '견인 이동불가'라는 표시가 붙어있다
고씨는 지난 6월 27일 기아자동차의 주력상품으로 6월말 출시돼 한달에 7천~8천대 판매되고 있는 카렌스 2000di(LPG)차량을 구입했다.
구입 이후 주행중에 자주 시동이 꺼지곤 했지만 고씨는 새차에 익숙하지 않는 자신의 운전미숙 탓으로 생각했었다.
이날 일을 겪고 나서야 '아, 이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고씨는 인터넷에 들어가 같은 사례가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동일 사례는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갑작스레 시동꺼지는 차량 많아
"차가 밀려서 잠시 정차하였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동이 꺼져있었습니다"- 김영민(dandy1042)
"차산지 5개월 만에 고장났습니다. 주행중에 뒷좌석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나면서 시동이 꺼지고는 재시동이 안되더군요"- 김지훈
"차 산 뒤 3번 시동이 꺼졌습니다. 듀티(공기,연료 혼합비율)조정을 받아도 안되고, 믹서교환했는데 또 시동이 꺼졌습니다.도대체 뭐가 문젤까요"-장철민(jx707)
'이건 내 차만의 문제가 아니다.카렌스 2000di를 새로 산 사람은 까딱하면 사망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고씨는 좀더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고씨는 http://car2000.hihome.com이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같은 피해를 본 소비자들이 모여 공동대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7월 29일 개설된 홈페이지에는 하루평균 150명이 방문했으며 8월 11일 홈페이지 폐쇄까지 2주간 20여건의 엔진정지사례가 신고됐다.
홈페이지에는 7월 30일 '카렌스 동호회(아공젖:아빠의 공갈젖)에 가시면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알려서 홍보하시기 바라면서'라는 글도 올라왔다.
고씨는 '아공젖(http://my.netian.com/~otercc5)'이라는 카렌스 동호회 홈페이지를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도 같은 경험을 한 피해자들의 '문의'가 10여건 접수됐으며 엔진 정지 유형까지 정리가 되어있었다.
시동꺼짐의 유형까지 정리될 정도
'아공젖' 게시판에 글을 올린 김모(knight03)씨는 "제가 인터넷 상에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를 50여건정도 봤는데 현재 출고되고 있는 대다수의 차량이 마무리 점검상태가 부실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고 지적하면서 '2000di 시동꺼지시는 분들 참고'라는 제목으로 엔진정지사례 유형을 올려놓았다.
▲신호대기 중 클러치, 브레이크 조작 때
▲커브길에서 클러치, 브레이크, 핸들조작 때
▲클러치만 밟아도 엔진회전수 급강하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고씨는 창원사업소에 강하게 항의했고, 창원사업소측은 영업사원을 동승시켜 주행중 시동꺼짐 현상을 확인했다.
또한 창원사업소의 연락을 받은 기아자동차 본사 정비기술팀은 8월 11일 창원으로 내려가 차량을 직접 확인했다.
8월 15일 현재 기아자동차 양평동 A/S센터에 입고된 카렌스2000di
창원사업소는 엔진정지현상으로 항의하는 고객의 차 9대를 대해 수리 해줬다.
그러나 기아자동차 본사에서는 "듀티값을 조정하는 간단한 정비이므로 전국적인 수리차량의 수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일부 차량에 대해 수리를 해 줬음에도 고씨의 홈페이지에 계속해서 피해사례가 올라오자 창원사업소는 카렌스 2000di의 일반적인 현상일 수 있다고 추정하고 고씨의 홈페이지에 '카렌스 2.0 시동꺼짐 현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띄웠다.
창원사업소는 카렌스 2000di에 ▲주행을 계속하면서 80∼100Km 부근에서 클러치만 밟고도 rpm(엔진회전수)이 400까지 떨어져 시동꺼짐 ▲클러치를 밟고 커브주행시 rpm이 400이하로 떨어진 상태에서 약 50rpm정도 더 저하되어 시동이 꺼짐 ▲초기 시동시 엔진회전수 불안정 등이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카렌스 2000di 엔진
사업소측은 "현재 출고 이후 문제가 발생한 차량은 모두 조치했지만 혹시 조치를 받지 못한 고객은 가까운 지정공장, 카클리닉,직영사업소에 입고하면 조치 받을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있지만 별 것 아니다"
창원사업소 고객상담실은 "고씨의 차량은 출고당시 듀티값이 미흡하게 조정돼있었다"며 "대부분의 LPG차량은 듀티값을 가끔씩 조정해 주면서 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문제는 있지만 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아자동차 본사 고객상담실도 "시동정지현상이 나타나는 차량은 일부에 불과하고 다른 차종에서도 나타난다"며 "전체 차량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기아자동차측은 일부 차량의 듀티값만을 조정하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카렌스의 하자가 차량을 교환해 줘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강력히 항의하는 구입자에겐 차량교환도 검토
본사 정비기술팀의 한 관계자는 "지정서비스센터를 통해 입고되는 모든 차량에 대해 듀티값을 점검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혀 기아측이 사실상 모든 카렌스 2000di에서 이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지난 7월 카렌스 2000di를 구입한 A씨는 시내 한가운데서 시동이 꺼져 차량을 관할사업소에 입고시켰다.
아직 임시번호판을 부착한 카렌스2000di가 정비를 기다리고 있다
사업소에서는 "배선 접촉불량이었다"며 차를 다시 돌려보냈고, 다시 시동꺼짐이 발생하자 A씨는 교환을 요구했다.
사업소측은 새 차량으로 교환해 주기로 약속하고 합의서를 작성했다.
자동차 정비업 관계자들은 대부분 기아자동차의 'LPG차량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주장에 대해 "간혹 LPG자동차의 경우 사용 몇 년후 듀티값이 변동되기도 하지만, 모든 차량에 대해 정기적으로 조정을 하면서 타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주행중 시동꺼짐은 사고와 직결
차량 전문가들은 주행중 엔진이 정지하게 되면,파워 스티어링(핸들조작을 부드럽게 해주는 장치)이 멈추게 되어 핸들 조작이 어려워지며, 브레이크 작동능력도 정상치의 절반이하로 떨어져 사고 위험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기아 측이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인 지난 8월 16일 김모(30,경기도 용인)씨의 경우, 구입한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카렌스2000di를 몰고 수지에서 용인으로 가는 국도에서 주행중 시동이 꺼지는 바람에 제동이 되지 않아 앞차와 부딛히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김씨는 다행히 저속 주행중이어서 피해가 크지 않았다.
이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기아측이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자 구입자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소비자들 리콜 요구
'아공젖' 게시판에서 장모씨는 "기아자동차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밝히고 공개리콜을 실시하는것이 앞으로 발생될지도 모르는 주행중 시동꺼짐으로 인한 인명사고를 막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요"라고 지적했다.
또 고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남긴 이모씨도 "기아는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면 소비자 보다 먼저 솔선 수범하여 진상을 밝히고 이에 합당한 조치를 하여야 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홈페이지를 만든 고씨는 "기아자동차가 진정 고객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공개 리콜을 해야 하며 지금까지 2000di에서 일어난 사고를 찾아내서 그 원인분석을 해야한다"며 기아측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