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까지 메일을 주고 받던 동티모르의 NGO활동가 자파르씨가 납치돼, 지금도 생사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그곳에선 NGO활동가 한사람의 죽음이 대수롭지않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25년동안 인구의 1/4이 사라졌고, 독립투표가 진행되던 보름동안 1만명이상이 죽음을 당한 동티모르.
그 곳은 바다 건너편의 또 다른 '광주'였다.
99년 8월 동티모르에 독립투표감시단으로 파견됐던 국제민주연대 상임활동가 최재훈(29)씨.
"바로 옆 블록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역사적 배경과 원인은 달랐지만 국제사회의 이해관계 때문에 벌어진 전쟁 속에서 인간의 생명이 무수히 사라져가는 '또 다른 광주'를 보았을 때, 슬픔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80년 광주'를 겪은 지식인들이 평생을 가슴 속에 지니고 살았던 그 '원죄의식'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90년대 초, 소위 민족해방(NL)계열 주도의 대학가에서 통일운동과 반미운동으로 활동했던 그는 99년 7월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국제민주연대로 분리)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학생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특히 국제인권운동을 하게된 배경은 무엇인가?"
"솔직히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활동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가게 된 동티모르에서 무엇인가 고민해야할 것을 찾았습니다"
수 년간의 학생운동을 정리한 그는 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운동을 할 것인가, 전공(영문학)을 살려 계속 공부를 할 것인가 고민도 많았다.
그러던 그에게 경험삼아 선배가 권해준 국제인권센터는 커다란 반성의 계기가 됐다.
'인간을 위한 운동이 우리 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닌가'
"물론 자기가 태어난 기반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70·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이 어려울 때, 수많은 외국의 인권, 평화단체들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는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제 외국의 문제도 우리의 문제와 같은 비중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동티모르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우리나라의 민주화 토대도 부족하다"는 시각차이를 보였다.
그는 힘있게 말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다 완성한 후에 돕는다는 생각은 안됩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난 7월, 국제민주연대는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국내 최초로 열린 베트남 평화문화제 '사이공, 그날의 노래'는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 세상에 고백합니다"라는 부제를 달고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
"민간인과 적의 구별이 안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으로 합리화 한다면 노근리 문제 등 미군의 양민학살 문제 역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요즘 최재훈씨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치에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제국주의 국가, 한국의 기업은 이 땅을 떠나라!"
"어느새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제국주의'국가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노조탄압과 대량해고 등으로 노동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한국기업에 불을 지르는 경우고 있었고, 급기야는 한국대사관이 '반제반식민주의 단체'에 의해 습격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상근자 5명과 외국인 1명을 포함해 자원봉사자 10여명으로 움직이는 국제민주연대.
"해외진출 한국기업에 대한 감시활동을 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반대운동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교육사업으로는 중학교 특별활동시간을 통해 인권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재훈씨는 9월 25일부터 문정현신부(SOFA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와 함께 SOFA문제를 알리러 미국으로 간다. 10월 1일까지 워싱턴과 뉴욕의 재미교포들을 만나 각 도시에서 집회를 열 계획이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국제민주연대는 뭐하는 곳입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늘 받는 질문인데도 어렵네요"라며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인종과 계급을 뛰어넘어서 인권이 보장되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곳입니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