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하포드 역을 맡은 톰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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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스탠리 큐브릭은 아주 얌전해졌다. 편집증자, 완벽주의자 등 온갖 광기 어린 수사를 달고 다녔던 그는, 자신도 모른 채 유작이 돼버린 (99)에서 '허튼 욕망'이 불러오는 위험성을 고발한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매 3분마다 한 번씩 음모를 노출하고 집단 섹스의 난장판을 보여주는 데도 야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거다. (68)나 (71)에서 거침없는 폭력과 난폭한 이미지의 향연을 보여줬던 감독의 유작 치곤 퍽 도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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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듯, 은 '성(sex)'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에 관한 영화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제목처럼 '눈을 질끈 감고(Eyes Wide Shut)'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노려보면 노려볼수록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안으로 숨어버리는 메시지들. 욕망의 습성이 그러하듯, 의 메시지는 이구아나의 몸빛처럼 잡힐 듯 말듯 하다가 금세 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 흐르는 가운데 니콜 키드먼이 나신을 드러낼 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성적 판타지에 관한 스탠리 큐브릭 식의 전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뉴욕 상류층 부부가 겪는 에로틱한 유혹의 에피소드들은 단지 성적 판타지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강렬한 상징을 담고 있다.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선 일종의 가면이 필요하다는 것, 욕망의 한 가운데서 잃어버린 가면(가면이 페르소나의 어원이라는 것에 주목할 것. 페르소나는 곧 나의 분신을 뜻한다)은 바로 그 순간 아내 곁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 등. 하포드 박사가 친구에게 받은 암호 '피델리오'나 앨리스가 침실에서 보고 있던 비디오 하나까지, 이 영화엔 무심코 흘려버릴 수 없는 강렬한 상징들이 두루 포진해 있다.
결혼 9년째. 7세의 딸(헬레나)과 남부럽지 않은 저택, 완벽한 외모(그들은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찬한다)를 지니고 있는 하포드 부부. 처음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삶이 어떤 장애물에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뒤늦게 찾아온 욕망은 이들의 가정을 '유리의 성'처럼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으로 뒤바꾼다. 먼저 자신 안에 숨겨진 내밀한 욕망을 고백했던 사람은 부인 앨리스 하포드(니콜 키드먼)다. 그녀는 지난여름 해변가에서 만난 해군 장교에게 성적 욕망을 느꼈으며, 단 하룻밤의 즐거움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단지 그뿐이다. 실제로 그녀는 해군 장교의 가슴에 머리를 묻지도 않았고, 에로틱한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다. 그러나 아내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은 하포드 박사(톰 크루즈)는 끊임없이 질투하는 자신과 투쟁한다. 그의 머리 속엔 이미 마음 속으로 부정을 저지른 아내의 정사 장면이 꼭꼭 박혀있는 것이다.
완벽한 외모를 소유한 아내 앨리스와 마찬가지로 젊고 능력 있는 의사인 하포드 박사 역시 온갖 욕망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며칠 전 빅터(시드니 폴락)의 파티에서 두 여자의 유혹을 받은 적이 있고, 그의 진찰을 받았던 여자 환자들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하포드의 '아래 쪽 물건'에 관심을 보여왔다. 단지 하포드 박사 자신만 이런 유혹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얼핏 완벽하게만 보였던 이들의 가정이 어긋나게 된 건 하포드 박사가 실제로 욕망의 문 앞을 어슬렁거렸기 때문에 발생했다. 대학동창 닉이 건네준 암호 '피델리오(이탈리아어인 'Fidelio'는 라틴어 어원 'Fidelis'에서 나온 것으로, '충실한, 성실한, 정숙한'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를 이용해 가면파티에 참석한 하포드 박사는 그 집에서 마약과 섹스 등 온갖 너저분한 욕망에 취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리곤 자신 역시 욕망에 깊이 심취하려 는 순간, 한 낯선 여자의 충고("지금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당신은 곧 죽게 될 거")를 듣고 욕망을 접는다. 상상 속에서 끝낸 욕망도 죄악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은 이것보다 더 큰 죄악, 곧 죽음을 부르는 일임을 이 영화는 조용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큐브릭 감독 자신이 을 통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욕망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지속되는 것이고, 허튼 욕망을 쫓아 삶을 낭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영화의 마지막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대사는 이런 메시지를 한층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큐브릭 감독은 한 가지 장치를 통해 자칫 도덕적이 될 뻔한 메시지를 비껴갔다. 빅터가 작가 오비드의 말을 인용해 남긴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위해 말년의 고통쯤은 감수해도 좋지 않은가." 은 결코 삶과 욕망, 행복의 삼각 편대를 어떤 식으로 운용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 답을 내놓지 않았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빅터의 시각으로, 또는 하포드 부부의 시각으로 삶과 욕망의 관계를 재단해 볼 수 있다. 그래도 제목으로 차용된 '아이즈 와이드 셧'은 욕망에 대해 눈을 질끈 감고 살라는 큐브릭의 경고처럼 느껴져 재미있다.
사족)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워너 브러더스 관계자들과 최종 편집본 시사회를 가진 지 4일만에 갑작스럽게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죽기 전 변호사를 통해 "영화에 약간의 흠집이라도 내선 안 된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 때문에 의 한국 개봉은 1년 이상 늦춰졌다. 음모 노출 및 집단 섹스신 등이 심의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까닭이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측은 큐브릭의 유언 때문에 문제가 되는 장면을 잘라 내거나 가림처리(Masking)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으나, 결국 1년만에 일부 타협해 심의를 통과했다. 필름을 자르지 않는 대신 몇몇 장면을 가림처리 하기로 한 것. 이에 대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의 남윤숙 과장은 "너무 절묘하게 가림처리 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보기엔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감독·스탠리 큐브릭/주연·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시드니 폴락/러닝타임·159분/개봉 ·9월2일
황희연 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