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문을 연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처방전을 들고 약방을 전전했으나 처방약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약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오래 전에 수입을 중단하고 직접 제조를 시작하였다는 대답. 그런데, 수요가 별로 없는 약이라서 아직 구하지 못한 채로 지내고 있다.
행여 그 약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성분과 효과가 동일하다는 임상실험 증거가 없는 한 부작용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안 먹고 버틸 수 있다면 그럴 작정이다. 준비 안된 의약분업이 초래한 거대한 불신과 불편이 이제 현실적 공포로 나타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현행 의약분업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의사와 약사를 인터뷰하고 어렵게 도달한 결론이다. 정부는 더 이상 내줄 것이 없다고 강공책을 선택하였는데, 잘못된 판단이다. 약사와 제약회사의 이윤을 불리는 것 외에 국민을 죽이고 의사를 죽이는 부당한 정책을 선진의료를 명분으로 강행하고 있을 뿐이다.
의료와 건강에 관한 한 ‘과도기’를 상정하는 것도 위험천만한 발상이며,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온 한국의료를 1980년대 공산권 수준으로 후퇴시킬 것이다. 현행 의약분업에 내재된 의재(醫災), 약재(藥災), 재정위기는 총체적 의학파탄과 건강파탄을 예고한다.
대체조제와 임의조제를 암암리에 허용하는 개정약사법은 본래의 취지에 위배된다. 정부는 약 구입 편의를 위해 600품목 내에서 처방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2만여종 약품의 3%에 지나지 않기에 나머지 97% 중 상당 부분은 대체조제와 임의조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부정맥 약도 12가지에 달한다.
약이 없어 대체조제한 약을 복용하고 뇌일혈을 일으켰다면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현행 의약분업은 의학을 조제권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의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수없이 많다. 대형약국은 평균 1200여종의 약을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수요가 적은 약은 이윤이 없어서 주문 목록에서 제외된다. 제약회사도 마찬가지다. 이윤이 없는 약을 수입하거나 직접 제조해서 공급할 필요가 없다. 신약개발과 제약기술의 발전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면, 미친 사람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제 희귀병을 앓는 환자들은 모두 미국과 일본으로 가야 할 판이다.
진료권의 침해는 그렇다 치자. 화난 의사를 달래려고 정부는 의사처방전료를 67%인상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약사의 조제료(3일분)는 450% 인상되었고, 주사약조제료는 신설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이 의보수가 인상의 주요인이다.
의료보험료를 올리는 것은 참을 만하다. 그런데 그 돈이 의료기술, 의학교육, 국민건강에 쓰여진다면 좋겠지만 조제, 유통, 보험관리에 상당부분 할애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번 사태에서 드러났듯 의사와 병원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국민건강을 위해 전문지식과 의학발전에 온 정신을 쏟아야 할 의사에게 도산하지 않도록 소사장의 기민한 상혼을 발휘하도록 강요하는 이 제도는 비윤리적이다. 하루 100여명의 환자를 돌보아야 간호사 월급, 건물임대료, 장비대여료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은 의사들을 소상인으로 만든다.
이러고도 우수한 서비스와 저렴한 비용을 요구할 것인가?아플 때 그들이 언제나 그곳에 있어주기를 기대하는가?
의료대란이 분명 밥그릇 싸움으로도 비친다. 저질 병원서비스, 의사집단의 오만한 폐쇄성도 문제지만 더 악화될 국민건강, 더 쇠퇴할 의료기술, 곧 닥쳐올 재정적자가 이제는 더 심각하게 논의될 만도 하다. 의료보험(미국)과 의료보장(영국)은 판이하다. 의료보험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에서 의료보장적 제도를 강행하는 것은 우수인력의 퇴장과 의학파탄을 재촉한다.
이런 때 히포크라테스와 허준을 들먹이는 것은 괜한 정의감에서 나온 무지한 폭력임을 알아야 한다. 이 시점에서 ‘보장’해야 할 것은 짓밟힌 그들의 직업적 자존심과 의료헌신을 위한 인센티브다. 이런 정책이라면 전경에 몰려 허탈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 어떤 젊은 의학도가 내뱉던 말처럼, 허준도 이 나라를 떠날 것이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