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시작된 서울연극제의 개막작 ‘바다의 여인’(연출 로버트 윌슨)은 ‘백번 듣기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는 속담에 딱 들어맞는 공연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명과 음향으로 만든 ‘첨단 하이테크의 충격’.
무대 구성은 초라할 정도로 단순하다. 삼각형을 연상시키는 중앙 무대와 그 위의 돛대가 전부. 그러나 전체 등장 인물이 ‘양념’식으로 나오는 도입부가 암전되자마자 무대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조명의 힘 만으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닷가가 되기도 하고 이방인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엘리다(윤석화 분)의 집이 되기도 한다. 배우의 몸짓과 감정의 톤에 맞춰, 카멜레온처럼 바뀌는 조명의 깊이와 다양함은 때로 회화적인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한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울려내는 선율감과 입체적으로 조율된 음향 또한 놀라움과 즐거움을 뜸뿍 안겨 준다.
그러나 이같은 하이테크의 ‘후광’이 감동의 물결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극작가 수잔 손탁이 입센의 원작을 재각색한 이 작품의 초점은 엘리다로 상징되는 여성의 삶.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자유 의지로 인생과 사랑을 찾는 엘리다의 모습이다. 자상하지만 열정적이지 못한 나이든 남편 하트위그(권성덕)의 결혼 생활에 옛 남자(장두이)가 등장하면서 엘리다의 자아는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바다의 여인’(윤석화)은 무대에서, 관객들은 객석에서, 서로 멀뚱멀뚱 ‘관찰’하면서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습니다’형으로 치켜 올라가며 반복되는 대사와 스톱 모션처럼 분절되는 몸짓 등 ‘윌슨형’의 연기와 대사는 그가 원하는 이미지를 낳기보다는 장면과 이야기가 따로 노는 ‘거리’를 만들어버렸다.
이 책임을 모두 배우의 연기 탓으로 돌리는 건 적절하지 않다. 윌슨의 ‘연극 화법’은 관객은 물론 연극판에서 산전수전 겪은 배우들에게조차 생소하기 때문이다. 윌슨의 작품이 연극의 미래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아닐 지라도 하나의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내 연극계에 큰 충격과 쓴 ‘보약’이 될 듯 싶다. 9월3일까지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 02―762―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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