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 서울 광화문 근처인 김경숙씨(28·대한재보험)는 ‘중독된 사랑’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며칠쯤 그냥 지나치면 감질나고, 또 며칠 건너뛰면 생각나고.
“그냥 매운 게 아니에요. 속 전체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치열하게 먹고 나면 기운도 나고….”
낙지에도 중독된다. 김씨의 회사근처엔 요즘 낙지집들이 많이 들어서 점심시간이면 행복한 고민에 빠질 지경이다. 게다가 낙지요리집은 신세대와 고참 부원들이 모두 의견일치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화끈한 매운맛 혹은 코끝에 어린 마늘 맛이 좋대서, 덧붙여 나오는 콩나물의 시원함이 더 크게 느껴진대서, 그것도 아니면 정력이나 미용에 좋대서, ‘낙지마니아’들은 오늘도 종로구 청진동 낙지골목으로 몰린다.
◇역사와 전통
낙지볶음처럼 맵싸한 ‘낙지 전쟁’은 터줏할머니 박무순씨(83)가 올 봄 화려하게 컴백하면서 시작됐다. 1966년부터 서린동에서 낙지 집을 운영하던 박할머니가 7년간 자리를 떴다가 3월 종로구청 맞은편에 ‘원조할머니 낙지센터’를 연 것.
‘무교동 낙지골목’의 향수에 젖어있던 옛 고객은 물론 칼칼한 맛을 찾는 젊은층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단골을 확보, 두세개 업소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이곳에 파문을 던졌다.
낙지골목이 어떤 곳이던가. 60년대 후반부터 서울 종로구 서린동과 무교동 일대에서 10여개 업소가 낙지와 김치, 막걸리만 가지고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기로 명성을 높이던 곳이 아닌가. 비록 90년대 초반 도심재개발에 밀려 자취를 감췄지만.
특히 ‘돌아온 원조’는 박할머니의 아들 이중택씨(54)가 사장으로 있고 손자 이준호씨(27·중앙대 기계공학4)가 종업원으로 일하며 경영수업을 받는 등 3대로 이어진 ‘가업’임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뜨거운 경쟁
‘원조의 컴백’에 자극을 받은 기존업소들은 허름했던 간판을 주인 사진까지 넣어 새로운 감각에 맞게 다는 등 리모델링과 리뉴얼을 시작했다.
‘실비집’은 가뜩이나 상표도용이 많았는데 이참에 ‘이강순할머니 실비집’으로 상표등록을 마쳤다. ‘청진낙지’와 ‘무교동 낙지집’ 등은 원조 간판을 추가해 문을 열었다.
박무순 할머니의 수제자 한 사람은 지난달 ‘막내낙지’를 열어 청진동에만 7곳으로 낙지 집이 늘었다.
큰길 건너서도 4월에 문을 연 ‘유림낙지’를 위시해 4곳이 새 단장을 마쳤다. 유림낙지측은 특히 다른 곳과는 달리 대형주차장이 확보된 덕인지 “저녁시간이면 강남에서 원정 오는 손님들도 꽤 된다”고 말한다.
바야흐로 100m가 안 되는 직선로에 11곳의 낙지 집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업소별로 “제일 라이벌업소로 생각하는 곳이 어디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부분이 “경쟁자는 자신 뿐”이라고 대답했다.
◇낙지에도 패션이
이처럼 자구노력이 치열한 덕에 ‘빨간 낙지’로 대변되는 기존의 매운 양념볶음과 소시지 베이컨 감자 콩나물 등이 섞인 ‘불판’이 고작이던 메뉴판에도 새로운 요리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올 여름의 새로운 히트요리는 ‘낙지비빔밥’. 몇몇 후발업소에서 신세대 회사원들을 겨냥, 덜 매운 낙지양념에 콩나물을 적절히 섞어 내놓았는데 업소에 따라 4000원에서 6000원까지 값을 매기며 과열경쟁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재료에 들이는 공도 엄청나다. 원료에서 처지면 아무리 갖은 양념을 섞어도 금방 손님들이 돌아선다는 게 업소들의 일치된 의견.
‘서린낙지’의 박종훈 사장(65)은 “하루에 낙지 80여마리, 마늘 한관(3.75㎏)을 다 쏟아 붓는다”며 “여수에서 모든 재료를 직송하며 중국산은 절대 쓰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중국산 낙지는 뻣뻣한 데다 질기고 싱겁기 때문. 이렇게 낙지들의 맹렬한 전쟁 덕에 사람들의 입과 혀는 날로 즐거워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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