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끝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과정에서 특정후보에 대한 선호를 밝히지 않았다. 동교동계 대표주자로 나선 한화갑(韓和甲)후보가 ‘이인제(李仁濟)후보 지원설’에 휩싸인 권노갑(權魯甲)상임고문을 향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직격탄을 쐈을 때도 김대통령은 굳게 침묵을 지켰다.
당시 한후보와 권고문의 관계는 상당히 험악했다. 한후보측은 권고문을 비난하는 문건까지 작성했고 권고문측도 서울시내 모처에 모여 한후보측을 응징할 대책회의까지 했다. 물론 양측이 최종단계에서 ‘칼’을 접었지만 “‘동교동계’라는 문패는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로 갈등은 심각했다. 이런 갈등과정을 거쳐 한후보와 이인제후보는 선출직으로, 권고문은 지명직으로 나란히 최고위원이 됐다. 여기서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김대통령은 왜 동교동계 직계인 권노갑―한화갑 두 사람의 갈등을 좌시했을까. 또 김대통령의 의중대로만 움직인다는 두 사람은 왜 서로 정반대의 엇갈린 행보를 한 것일까.
김대통령에게는 차기와 관련해 두 가지 고민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40년 정치역정의 결과물인 ‘동교동계’를 임기 이후까지도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와 대결할 경우를 상정하고 승산이 높은 차기 대선후보를 양성하는 것이다.
두가지 고민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동교동계는 김대통령의 이념과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정치 결사체’이지만 뿌리가 호남이란 점이 다음 대선에서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년반의 임기가 남은 김대통령으로서는 ‘당의 유지 계승’과 ‘대선 승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당분간 상호견제에 의한 당내 세력균형을 꾀할 수밖에 없다. 이번 최고위원 경선과정에는 김대통령의 이같은 고민과 ‘원려(遠慮)’가 물씬 배어있다.
김대통령은 우선 동교동계의 차세대 간판으로 대중성을 갖춘 한화갑의원을 직접 만나 최고위원 후보로 내세웠다. 여기에는 동교동계 내부의 이론이 없다. 문희상(文喜相) 설훈(薛勳) 배기선(裵基善) 배기운(裵奇雲)의원은 물론, 경선 막판에 김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金弘一)의원까지 한후보측에 가세했다. 권노갑고문조차 “동교동계의 대표는 화갑”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이인제고문이 경선에서 낙선하거나 하위권 당선으로 상처를 받아서도 안된다는 게 김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당내 뿌리가 약한 이고문에 대한 적절한 ‘배려’와 전체적 안목에서의 경선관리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권고문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후보와 이후보의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권고문과 한후보간에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조성됐다. 차기 민주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동교동 내부의 미묘한 역학관계도 갈등 증폭의 요인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김대통령이 이처럼 이중적인 모습으로 비쳐진 데에는 동교동계 장악력에 대한 자신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동교동은 상도동과는 다르다”며 “김대통령이 적극 나설 경우 두 사람의 갈등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또 “김대통령은 후계구도가 확정되기 전까지 특정인에게 역할을 독점적으로 부여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견제와 균형을 통한 ‘분할통치’는 김대통령의 용인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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