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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허공에의 질주'-이념과 사랑

입력 | 2000-09-04 14:35:00


학생운동으로 격렬하게 들끓었던 80년대를 힘겹게 통과하면서, 오랫동안 마음 속에 남았던 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구절이었다.

"나는 인류를 사랑하지만, 매우 놀랍게도 일반적으로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특별히 개인으로서의 사람들은 덜 좋아한다."

80년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이념의 색깔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개의 이념은 사람이 사람을 억누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놓여진 위치에 상관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소박한 사랑의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 첫 마음은 얼마나 순수했던가! 그러나 이념에 집착하면 할수록, 씁쓸하게도 현실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입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부모에게 끼친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스물셋에 요절한 스타 리버 피닉스가 주연한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비디오로 보면서 엉뚱하게도 10여년 전의 일이 생각난 건 왜일까.

베트남전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71년, 네이팜탄을 개발하던 군사실험실을 폭파한 혐의로 10여년간 도피생활을 해온 아서와 애니 부부. 이들의 아들인 대니(리버 피닉스) 역시 6개월마다 한 번씩 이름과 머리색을 바꾸고 부모와 함께 부초처럼 떠도는 생활을 한다. 부모의 비밀 때문에 여자친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대니는 늘 위축된 듯 어깨를 움추리고, 그의 손짓과 표정에는 주저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있다.

아직도 스스로를 '해방군'으로 믿고 살고, 가는 곳마다 사회운동을 조직하지만 가족을 이끌고 전국을 떠돌며 살아야 하는 대니의 부모인들 행복했을까. 술에 취해 운전면허 번호와 징집 번호를 줄줄 외우며 "내 이름은 아서야. 폴이 아니야"하고 주정을 하는 대니 아버지의 외로움 역시 마음을 저미게 한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대니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학교 선생이 줄리아드 입학을 권유하고 대니 역시 대학 진학을 원하지만, 대니의 아버지는 "우리 가족은 조직이다. 흩어지면 조직이 깨진다"며 강경하게 반대한다.

자신을 사로잡은 것이 이념이건, 아니면 그저 착하게 살자는 마음이건, 구체적인 사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모든 가치는 공허한 것 아닐까. 대니의 여자친구는 "무엇이 너를 겁나게 하느냐"는 대니의 질문에 "우리 부모처럼 착한 사람들이 날 겁준다"고 이야기한다. 하녀에게 헌 옷을 주지만 절대로 하녀와 친해지지는 않는, 사람 자체에 관심이 없는 부모 때문에 대니의 여자친구 역시 대니만큼 외롭다.

드높은 이상과 구체적인 사람에 대한 사랑. 도대체 인생에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 대니의 대학 진학과 가족의 안전을 놓고 갈등하던 대니의 어머니는 결국 아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버렸던 평범한 인생으로 아들을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대니의 어머니는 70년대에 "아버지는 제국주의의 돼지이고, 인종차별의 원흉"이라고 비난하며 매몰차게 떠나버렸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대니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힘겹게 고백한다.

위험하지만 마음을 사로잡은 열정에 들뜬 젊은 날, 무모한 열정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로 꽂힌다. 때로는 희생이 불가피하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이상 때문에 타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처럼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 아닐까.

사실 희생 자체보다,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할 권리가 내게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더 비극적이다.

최근 들은 소식 가운데 너무 마음이 아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는 북한에 송환된 어느 비전향 장기수의 아내의 사연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들까지 낳고 수십년을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남편은 가족을 버리고 이념을 선택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동안 평생의 한을 풀고 싶은 남편의 마음도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지만, 험한 세월을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이념을 선택해 북으로 떠난 남편을 말리지 못하고 가족사진을 찍어 선물하는 아내의 심정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평생을 사로잡은 이념과 나의 몸짓 하나에 울고 웃는 구체적인 사람, 인생에선 정말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

김희경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