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야쿠자를 살해한 죄로 31년8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 지난해 9월 풀려나 '어머니의 땅'으로 영구 귀국한 권희로씨(權禧老·71)가 1년만에 고국땅에서 다시 철창 신세를 져야 할 딱한 처지에 놓였다.
권씨의 인생 역정은 어렸을 적 냉대와 외로움에 이어 국내에서 옥중결혼한 부인에게 배신까지 당하는 기구한 가시밭길이었다.
▽일본생활=권씨는 두 살때 아버지를 잃고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재혼했다. 이때 새 아버지의 성을 따 김희로로 바뀌었다. 의붓아버지의 구박에 견디다 못해 13세때 가출했다. 일본 사회로부터 천대를 받다보니 형무소를 들락거리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결혼에도, 사업에도 잇따라 실패한다. 일본인에게서 빌린 돈이 무기수로 장기 복역하게 되는 화근이었다.
빚독촉을 하던 야쿠자가 협박하며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에 격분해 권총을 쏘아 야쿠자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부상(나중에 사망)을 입혔다. 여관으로 달아나 숙박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88시간 농성하다 붙잡혔다. 68년 2월20일, 그의 나이 마흔살 때였다. 75년 11월 최고재판소에서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는다.
▽국내생활=지난해 9월7일 한국땅을 밟은 권씨는 자비사 박삼중(朴三中)스님 등 후원인들의 도움으로 부산 연제구 거제동 한 아파트에 정착해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또 79년 일본에서 옥중결혼했던 돈모씨(52)와 함께 가정을 꾸려 안정된 노년을 보내는 듯 했다.
그러다 올들어 사회단체와 언론의 관심이 사라지고 4월말에는 돈씨가 성금을 모아둔 예금통장에서 5800만원을 빼내 달아났다.
인간적인 배신감으로 방황하던 권씨는 신도의 소개로 알고지내던 박모씨(43·여)와 6월부터 가까워졌고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권씨는 박씨에게 매달렸고 지난달 말 박씨와 일주일간 여행을 떠났다. 박씨로부터 남편이 낌새를 채고 자신을 괴롭힌다는 말을 듣고 살인을 결심하게 됐다.
한 경찰관은 "권씨는 나이가 칠순이 넘지만 험한 감옥생활과 외로움 등으로 귀국 후에도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했다"며 "한순간 영웅 대접을 해준 뒤 잊어버린 세상 인심탓도 있다"고 말했다.〈윤양섭기자·부산=석동빈기자〉laila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