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자신이 인생에서 발견한 것을 이야기로 풀어쓰는 사람이다. 그가 발견하는 것은 사회의 모순일 수도 있고 본능의 진실이거나 영혼의 전율일 수도 있다. 어쨌든 소설가는 그것을 써서 발견자로서의 책임을 짊어진다.
인터넷 시대의 디지털 환경은 이같은 발견자의 자신감을 뒤흔들어 놓았다. 심란한 얼굴로 소설의 위기를 말하는 작가들이 늘어났다. 멀티미디어의 등장으로 독자들의 관심이 문학에서 멀어져 가는 현상은 차라리 표면적인 위기라고 한다. 정보혁명이 초래한 현실의 복잡성 때문에 인생을 관찰하고 뭔가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무력감이야말로 한층 더 심층적인 위기라는 것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인터넷의 쌍방향성은 독자와 작가의 구별을 없애버렸다. 또 독자 스스로 이야기의 중요 지점에 개입하여 뒷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 픽션이 등장했다. 미국에서 CD로 출판된 셀리 잭슨의 하이퍼 텍스트 픽션 ‘패치워크 걸(The Patchwork girl)’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다중인격의 역동성과 여성적인 몸의 상징성을 잘 표현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소설은 빠른 속도로 시뮬레이션 게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삶의 궁극적인 의문들을 다뤄온 소설가들에게 작품이 네트워크 위에 떠서 음악 사진 동영상과 결합돼가는 이런 변화는 확실히 당혹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소설가의 존재 이유를 뒤흔들 만큼 본질적인 변화일까. 단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정보통신의 혁명적 변화는 인간적인 힘의 발전이며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가능성의 발전이다. 인터넷에 의해 밀실과 광장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인류는 지역과 연고의 낡은 구속을 깨고 정보와 표현의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같은 진보의 동반자였다. 돈키호테’에서 또 ‘보봐리부인’에서, 소설은 하나의 절대 가치에 의해 형성되는 권위주의적 질서에 반대하고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인간적인 세계의 실현을 갈망해왔던 것이다.
정보혁명은 단기적으로 전통적인 소설의 고상한 취향과 미학적인 문체, 현실 비판적인 상상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소설을 현대예술의 난해성이라는 늪으로부터 건져 올리는 긍정적인 결과를 거둘 것이다. 모더니즘 이후 현대 예술은 집단적인 이해보다 개별적인 표현을 옹호하며 전문화됐다. 그 결과 예술은 대중을 소외시키고 특정 관객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취미가 돼버렸다. 지나치게 내면화하고 사사화(私事化)해 독자들을 소외시켰던 20세기 소설 역시 복잡하고 불투명한 현실에 대응한다는 미명 아래 스스로 복잡하고 불투명한 현실이 돼갔다고 말할 수 있다. 위기에 처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모더니즘 이후의 일부 소설이지 소설 그 자체가 아니다.
최근 소설가들이 전자책으로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한 것은 소설이 시대와 함께 발전해가는 중요한 징후의 하나이다. 전자책의 등장은 역사의 필연이다. 보네의 인간지능 연구에 의하면 현대 정보사회는 사람들에게 하루 1메가바이트의 정보 처리와 4만개의 개념 기억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잠재적 정보처리능력의 한계점이다. 한계가 있는 인간의 지능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지식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인류는 전자책과 같은 정보 물류와 정보 저장의 단축, 핸디 컴퓨터와 같은 정보 도구의 효율화, 인텔리전트 로봇과 같은 정보 농축 기능의 향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창기인 아직까지는 전자책 소설이 활자만으로 된 종이책 소설을 그냥 모니터상의 인터페이스로 읽는 정도의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가들은 금방 전자책에 맞는 새로운 서사(敍事)의 문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사진과 음악 동영상 등의 이질적인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환상성과 이야기성이 극대화되는 방향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세상은 변하지만 소설도 역시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소설은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 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지 못해 일시 위축될 수 있고 소설가 역시 불우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도 소설가가 스스로 짊어진 인생의 발견자로서의 임무는 중요하고 유의미하다. 역사는 시대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끝까지 정성과 열정을 기울이는 소설가를 원하고 있다.
이인화(소설가·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