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여교사였던 성모씨(36).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시간강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간강사 생활이 지긋지긋해 다시 교사로 재취업하려 했다. 이번에는 박사 학위가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박사라는 이유로 채용을 꺼린 것. 성씨는 “박사 학위자도 중고교 교사로 떳떳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사 실업자가 늘고 있지만 박사는 계속해서 더 많이 나오고 있다. 박사 실업자는 개인적인 불행이자 국가적 인적 자원의 낭비다. 교육을 투자로 본다면 투자 효과가 0에 가깝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의 박사 과정 입학 인원은 △97년 9952명 △98년 1만460명 △99년 1만1966명 △2000년 1만2976명 등으로 계속 늘고 있다. 취업이 특히 힘든 인문계열 박사 정원도 99년까지 매년 6%씩 늘었고 올해는 16.4%나 늘어 3486명이다.
그러나 이같은 박사 양성 규모가 적절한지, 박사 실업자가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한 연구는 없다. 교육부 과학기술부 노동부가 각기 인력을 관리해 국가 전체의 통합성이 없다.
전문가들은 박사 인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박사 후 연수 과정자(Post―doctor)를 흡수해 이들이 계속 연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늘리든가, 정부와 기업체 등이 협력해 ‘인력 풀’을 소화할 수 있는 연구소 등을 만드는 것도 방안 중 하나다.
특히 인문사회 분야 연구소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세종연구소 등 5곳에 불과하다. 100여개 대학이 인문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사실상 교수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꾸려 나가는 연구소가 많아 간판이 무색할 정도다.
교육부는 96년부터 박사 후 연수 과정자 연구 지원 사업을 통해 한해 300여명에게 1인당 1600만∼2400만원씩 50억원을 지원하고 있지만 이같은 재정 지원만으로 박사 실업을 풀 수는 없다.
정모씨(37)는 호주에서 분체공학분야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한 대학의 프로젝트에 참가했지만 6개월도 안돼 이 프로젝트가 끝나자 ‘노는’ 신세가 됐다. 다시 호주로 돌아갈 계획이다. 고급 인력이 국내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국부의 유출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올해 인문학 지원에도 400억원을 배정했지만 대학이나 교수 입장에선 ‘푼돈’이다. 이 때문에 대학별이 아닌 지역별 연구소를 설립해 ‘인력 풀’을 공동 활용하자는 제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연구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박사 실업자 해소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
서울대 유평근(兪平根·불문학)교수는 “미국은 은행에서도 영문학 박사를 채용해 경쟁력을 높이는데 우리는 눈앞의 생산성만 본다”며 “기업체 등이 기초 학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한민구(韓民九)사무총장은 “고급 인력에 대한 중장기적 수급 예측이 없어 문제가 커진 만큼 국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대부분 박사 학위자인 시간강사에 대한 왜곡된 ‘인력 착취’를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다. 성공회대는 지난해부터 강사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일정급을 주고 강의가 없는 방학에는 월 24만원씩, 연간 96만원의 연구비를 준다. 호칭도 ‘외래 교수’로 하고 전용 휴게실을 만들고 명함을 지급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 대학 양기호(梁起豪)교무처장은 “강사에 대한 대우가 나아지자 강의가 충실해져 교육의 질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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