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보안검색에 대한 불쾌함’, 그것도 해당국이 아니라 제3국에서 일어난 일로 한 국가의 대표단이 외국 공식방문을 취소한 것은 외교사를 통틀어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형식상 북한의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일행이 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대체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당사자 주장과 외신을 종합, 재구성했다.》
4일 오전 10시반(한국시간 오후 5시반·이하 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 A터미널.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최수헌 외무성 부상(차관) 등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 대표단 15명이 여객기에 탑승하기 위해 보안검색대 앞에 섰다. 2일 북한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서 베를린에 도착한 이들은 4일 오전 7시경 베를린 테겔공항을 출발, 이곳에서 뉴욕행 아메리칸항공(AA 175)편으로 갈아타기 위해 절차를 밟는 중이었다.
외교관 여권을 가진 여행객은 보안검색 과정에서도 상당한 예우를 받는 것이 국제적 관례. 그러나 아메리칸항공 소속 보안요원 2명은 북한 대표단을 일반인보다 철저히 검색했다.
보안요원들은 북한 대표단의 가방 등을 일일이 열어 검색했다. 양복 윗도리와 신발까지 벗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북한 대표단이 “우리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만찬에 초대받은 북한 대표단”이라며 강력히 항의하며 소란이 빚어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검색했는가에 대해서는 북한 대표단과 아메리칸항공측 설명이 다르다. 북한 최부상은 5일 기자회견에서 “보안요원이라는 것들이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면서 인체의 창피한 부분(국부)까지 샅샅이 조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메리칸항공측은 “양복 상의와 신발 정도만 조사했다”고 말했다.
아메리칸항공측은 김위원장에 대해서도 수행원들과 마찬가지로 검색하려 했다. 그러자 북한 대표단은 이를 ‘단호히 거부’(최 부상의 표현)하면서 “이 사실을 워싱턴에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잠시 자리를 떴던 보안요원들이 돌아와 “이른바 ‘불량 국가(rogue state)’ 딱지가 붙은 8개국(실제는 7개국임) 대표단은 예외 없이 이같은 검색을 받아야 한다”며 다시 김위원장에게 검색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김위원장은 “그렇다면 탑승하지 않겠다”며 일행에게 철수지시를 내렸다. 북한 대표단은 걸어서 10분 거리의 공항내 셰러턴 호텔으로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대표단은 뉴욕행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셰러턴 호텔로 향하기 전 북한대표단은 다음날인 5일 오후 1시25분 뉴욕으로 출발하는 루프트한자(LH 402)편을 예약한 것. 외신은 북한측이 아닌 아메리칸항공이 루프트한자편을 예약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밤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며 북한의 유엔대표부가 미 국무부와 줄다리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성과가 없자 북한대표단은 평양의 훈령을 받아 5일 오전 언론매체에 기자회견을 예고했다. 북한대표단의 미국행이 물건너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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