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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士칼럼]이어령/정보화의 제트엔진 'PC방'

입력 | 2000-09-07 23:20:00


한국은 산업문명의 지각생이었다. 그러나 정보문명의 진입에는 제트엔진을 달았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말한다. “이미 한국은 인터넷이라는 제트기를 타고 일본을 먼지 속에 남겨둔 채 멀리 떠나버렸다”고 최근 미국의 비지니스위크지가 평하고 있다. 정말 그렇다. 인터넷 열기와 인구, 그리고 그 기술력에 있어서 한국인은 물을 만난 물고기요, 여의주를 문 용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독창적 산물인 PC방이 세계를 놀라게 한다. 홍콩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를 주름잡는 e비즈니스의 거물들이 PC방을 견학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온다. 그런데 막상 PC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등잔 밑이 어두운 한국사람들이다.

▼한국인만의 탁월한 발상▼

앨 고어는 미국 부통령으로서보다 ‘정보고속도로’란 유행어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러나 정보의 네트워크 기반을 고속도로에 비유한 고어의 그 신조어만큼 정보사회와 거리가 먼 것도 없다. 고어의 발상은 미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던 바로 그의 아버지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고속도로의 개념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머리에서 생겨나 산업시대 자동차 문화가 키운 구시대의 유물이다. 정보네트워크는 바로 그런 고속도로의 개념과 이미지를 뛰어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은 발상이 바로 한국의 PC방이다.

고속도로를 자기 집 대문 앞까지 깔자고 주장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의 길은 집과 집을 잇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FTTH(Fiber To The Home)같은 정보고속도로 아이디어는 개인 집 안방에까지 8차로의 고속도로를 깔자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자금으로 보나, 기술력으로 보나 황허가 맑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서는 그것이 실현되기 어렵다. 미국의 비즈니스계가 고어의 말에 냉담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정보사회라고 하면서도 공공장소가 아니면 초고속 정보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다. 전화선에 의존해 있는 일반가정에서는 거북걸음이다. 오죽하면 인터넷의 인을 참을 인(忍)자라고 말했겠는가. 그리고 www를 월드 와이드 웹이 아니라 월드 와이드 웨이팅(기다림)이라고 읽고 있는가.

한국인은 공공기관의 초고속 정보서비스의 토끼와 가정의 저속 정보서비스의 거북을 한데 융합하여 ‘토북’을 탄생시켰다. 빨래방이 공공 세탁소와 개인 집 세탁장의 중간지대에 놓여 있는 것처럼, 그리고 노래방이 공연장과 개인 안방의 중간지대인 것처럼 PC방은 바로 가정과 공공기관의 중간지대에 마련된 정보서비스 공간이다. 한마디로 ‘방’자가 붙은 공간은 공공 공간을 사적인 개인 방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3의 공간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정보고속도로를 깔아주지 않아도 공공기관에서처럼 개인도 고속 정보서비스를 받을 수가 있다.

공공과 개인 사이에 그레이존을 만들어 낸 이 PC방은 어느 대기업이나 국가기관, 혹은 어떤 천재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시민들의 머리에서 나와 버섯처럼 자생적으로 번져나간 한국 대중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예부터 양극을 융합하여 그레이존을 만들어내는 한국적 전통문화가 있다. 물건을 운반할 때에도 한국인은 ‘바퀴’도 ‘몸’도 아닌 그 중간물 지게를 사용했다. 서랍을 나타내는 영어의 드로어나 일어의 히키다시는 모두 빼낸다는 일방적인 뜻밖에 없지만 한국말로는 빼고 닫는 양방향의 기능을 통합하여 ‘빼닫이’라고 불렀다. 정보 문명 자체의 특성이 바로 그레이존을 만들어내는 조화와 균형의 문명이다. 그것이 한국인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등급제등 규제추진 딱해▼

그런데 딱하게도 그러한 자생적 정보문화의 잠재력이 그동안 제대로 햇볕을 받지 못했던 것은 규제와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터넷의 등급제 같은 규제 발상이 아니라 PC방을 정보 인프라로 키우고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정보사회가 제트엔진을 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장애물이 생기면 느린 글라이더보다 몇 배나 위험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사이버 세계에서만은 제발 자생 개방 수평 분산의 힘이 정보문화의 추진력이 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어령(새천년준비위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