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철
이 즈음의 소설에서 온 생을 건 치열한 역사적 체험이나 카프카의 표현을 빌자면, ‘얼어 붙은 호수를 가르는 도끼날’과 같은 강렬한 인식의 충격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대신 나른한 일상, 지리멸렬한 연애담, 섬세한 심리의 표출 등으로 이루어진 ‘일상성의 미학’이 이 시대의 소설을 관류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린 이호철의 ‘비법, 불법, 합법(非法, 不法, 合法)’은 오랜만에 내 둔중한 문학적 상상력을 바짝 긴장시킨 문제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사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운명적인 역사적 체험이 한 인간을 평생 동안 지배한 ‘생의 충동’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김규환이라는 사내가 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6.25때 학도병으로 소집되어, 휴전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던 향로봉 지역에서 통신병으로 활동하던 중에 충격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시급한 작전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작전명령 불이행이라는 죄목으로 총살형의 위기에 처해졌다가 몇 분 차이로 가까스로 총살형을 면한 원상사와 연관된 사건을 그 현장에서 목격한다. 실상 김규환이 작전 명령이 하달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진술했더라면, 원상사는 총살형이라는 절대절명의 위기에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던 김규환은 침묵을 택한다. 말하자면, 김규환의 침묵 때문에 원상사는 억울하게 총살당할 뻔했던 것이다. 이 장면은 한 사람의 사소한 침묵이 또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역사의 냉혹함과 인생의 아이러니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그로부터 50년 후, 김규환은 우연히 ‘6.25 참전 수훈군인 모임’에서 문제의 원상사와 조우하게 된다. 50년 동안 간혹 김규환을 양심적으로 찜찜하게 만들었던 그 일화의 주인공과 드디어 운명적인 해후를 한 것이다. 원상사가 “그동안 내가 널 얼메나 찾았는지 아네. 헌데, 야하, 여기서야 이제 만나는군”라고 말하는 대목은, 50년 동안 간직해 왔던 김규환에 대한 켜켜이 쌓인 감정과 한을 한순간에 드러내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한이 원상사로 하여금 남한에서의 잡초 같은 삶을 지탱시킨 원동력이었으리라. 이 작품은 50년이나 지난 한국전쟁에 관한 소설적 담론이 얼마나 다양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그리하여 “그 전쟁 기간에 이 땅 곳곳에서 벌어졌던 실제 정황의 세부 세부는 어떤 필설로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없는” 풍요로운 문학적 토양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 즈음 주목할만한 분단문학이나 전쟁문학이 좀처럼 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뒤집어 보면,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전쟁과 분단의 체험은 문학적 축복으로 전환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울러 이 소설은 통일과 연관된 서늘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원상사가 “남북 정상들이 만났다고 저렇게 온통 야단들인데, 솔직히 난,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나 같은 이런 독종이 우리 대한민국의 50여년의 최저변을 사실상으로 버티고 왔듯이, 지금 북에도 북 세상을 최저변에서 사실상 버팅겨 온 나 같은 동류항 독종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남북 간의 그런 독종들끼리 진짜배기로 화해가 이뤄지기까지는 아직 멀었다”고 언급하는 장면은 통일에 관한 중요한 고려 사항을 한 가지 제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이 발표되기 며칠 전인 8.15 이산가족 상봉 때, 작가 이호철은 1·4후퇴 시절 19세의 나이로 월남한지 어언 50년 만에 북한에서 누이동생과 만났다. 실상 이러한 대목이야말로 어떤 소설보다도 문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 감동적인 체험이 작가로 하여금 또 어떠한 문학작품을 낳게 할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권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