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영화를 닮아가는 현상을 마치 위험한 탈선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생각은 아니다. 세상 곳곳을 여실하게 담아내는 카메라는 리얼리즘 소설이 품고 있었던 재현의 의지, 그것의 기술공학적 결론과 다를 바 없다.
도시의 대로와 골목, 광장과 밀실을 샅샅히 훑어보고 자재로이 옮겨다니는 발자크의 묘사는 카메라의 세심하고 자유로운 움직임과 얼마나 유사한가. ‘마담 보바리’의 농업공진회 장면, ‘안나 카레니나’의 경마 장면 같은 데서 플로베르와 톨스토이는 카메라의 눈 그 자체이다. 소설 기법에 일어난 혁신을 보면 카메라 혹은 화상(畵像)의 힘은 소설을 위협했다기보다 오히려 유혹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조이스가 영화 기법을 몰랐더라면 ‘율리시즈’의 더블린 묘사는 아마도 현재 알려져 있는 그런 모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적인 이야기 처리
영화적 감각을 구비한 신인작가의 출현이란 이미 문단의 뉴스거리가 아니지만 윤성희는 영화적인 이야기 처리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 그가 이번 가을에 발표한 단편 ‘모자’(문학동네)는 카메라 기법이 특히 산뜻하게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찻길 건너 편의점에 새로운 자동판매기가 설치되는 장면을 독립된 짧은 문단으로 제시한 서두에서부터 카메라의 존재를 연상하게 만든다.
‘운수 달력’ 자판기가 작중인물들의 현실 속으로 처음 들어오는 그 장면은 영화로 치면 앞으로의 사건에서 중요성을 가지는 시각적 정보를 사전에 제시하는 도입부 샷과 흡사하고 ‘찻길 건너’를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 그쪽 트럭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팔뚝의 근육’을 보여주는 순간은 ‘클로즈 업’과 비슷하다. 영화 기법과의 연관은 두 여성인물 H와 E의 행동을 제시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그들 사이를 왕복하는 서술 초점의 이동은 플롯 구축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과 그들의 세계를 시야에 넣고 마음대로 관찰하는 시점의 자의(恣意)에 따른 것이다. ‘모자’가 선사하는 작은 경이, 즉 서로 헤어져 그리워하는 H와 E가 그들 자신은 모르고 있으나 실은 같은 동네를 오가고 있다는 발견은 카메라를 닮은 서술 시점의 계산된 움직임에서 오는 효과이다.
‘모자’에 제시된 H와 E의 스토리는 현재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고달픈 삶의 한 단면을 읽게 해준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25평 아파트 전세금을 축내며 불안하게 지내고 있는 H는 점점 몰락하는 자신을 의식하며 ‘바닥’을 보고 싶다는 자폭의 심정에 사로잡히고, H의 돈을 떼어먹고 달아난 E는 스턴트우먼을 하며 변신을 위한 자기와의 ‘시합’을 벌이는 중이다.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H가 잡지에서 읽은 ‘최고의 설계사 왕’ 기사가 예시하듯이, 젊은이들에게 ‘성공’의 가망에 대한 믿음을 부추기고 시장성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자기개조로 그들을 내몬다. 운수 달력 자판기를 접점으로 해서 다가들고 멀어지는H와 E의 스토리는 믿지 못할 ‘운수’ 밖에는 믿을 데가 없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성공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겪고 있는 시련과 그 시련 속에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손상의 고통을 깨닫게 한다.
▽성능 좋은 캠코더처럼
H와 E는 별개의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자신의 생일을 모르는 E에게 H가 자신의 생일을 빌려주었다는 에피소드 등이 암시하듯이 상징의 차원에서 그들은 동일한 운명의 화신이다. 그래서 H와 E가 각자 떨어져 사는 가운데에서도 서로를 기억하고 행운을 비는 애틋한 우정은 불우한 청춘의 자기연민으로 확장된다. 윤성희는 자칫하면 초라한 앙심의 문학으로 떨어질 소지가 많은 스토리를 가지고 시장의 그늘 속에 주눅 들어 서식하는 젊음의 초상을 이뤄냈다. 윤성희 소설은 낙백한 젊은이의 영혼 앞에 사랑의 맑은 렌즈를 반짝이는 성능 좋은 캠코더이다.
황종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