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해방 직후에는 남과 북이 모두 군정기간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의 군사령관이 군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남쪽은 하지장군이 전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장군은 정치에는 문외한일 수밖에 없었고 한국의 실정은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정치인들이 군정장관인 하지장군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는가 하면 그를 이용하려는 음모 또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좌우익의 대립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였으니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태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정치의 앞날을 열어가야 할 하지장군이 누구의 말을 믿을지 몰라서 갈팡질팡했고, 자신의 선택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가리지 못하는 판단을 내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한국 정치인들도 하지장군의 비위를 건드려 불이익을 당할 필요가 없으므로 속으로는 걱정을 하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치 2선에서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인촌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책임을 맡기로 결심했다.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1895∼1947)에게 동행과 통역을 부탁한 뒤 하지장군과의 면담을 요청하게 되었다. 장덕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때였다.
하지장군의 방에 안내를 받은 인촌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만의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하지장군은 그제야 비서관을 밖으로 내보내고 인촌의 얘기를 들었다.
인촌은 ‘우리 둘은 친분은 없었지만 우정과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한 두 가지 얘기하고 살자’고 말했다.
그리고 인촌은 당신이 확고한 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대하는 사람들의 신분과 인품을 정확하게 구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점과,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또 다른 말을 하는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했다.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하지장군은 얼굴색이 빨개지면서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촌은 하나 하나의 예를 들어가면서 그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 당신을 찾아온 조○구씨에게는 이렇게 약속하고 어제 만났던 ○○○에게는 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일을 할 수 있으며 당신의 인격과 지도력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하지가 “알겠다. 시정하겠다”고 선선히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에 면담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촌은 “물론 오늘 있었던 일은 우리 둘로 끝나는 것이며 나는 진심으로 당신과 한국을 위해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 말이니까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그 뒤 인촌은 하지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인촌의 생일만 되면 축하카드를 보내주곤 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회고담이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런 조용하면서도 지혜로운 결단은 인촌이 아니고서는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아쉬운 사람은 이런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가 아닐까. 오해와 불이익이 뒤따를지 몰라도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조용한 용기인 것이다.
한 평생을 고려대에서 후학을 가르친 고 김성식(金成植)교수의 생각도 비슷했던 것 같다. 인촌이 살아 있을 때에는 실질적으로 야당이 분열된 일이 없었는데 인촌이 떠난 후에는 야당이 한번도 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 말을 들었다.
아마 386세대와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은 얘기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국보다도 자신을 앞세우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김형석(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