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좋아했던 동창생이 있었습니다. 4, 5학년 내리 같은 반이기도 했던 그 친구는 유난히 뽀얀 얼굴에 가끔 주근깨가 한두개 보이는 아주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6학년이 되어서 저는 2반, 그 아이는 8반으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냥 쉬는 시간에 8반에 가서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면 되는데 그 때는 그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토요일이 기다려졌습니다.
저희 학교는 토요일 오후 전교생이 사는 동네별로 ‘애향단’을 만들어 1단부터 50단까지 나누어 운동장 종례를 한뒤 하교를 하곤 했는데 저는 25단에 속해 있었고 25단과 26단 사이에 서있던 고적대에서 그 아이는 작은 북을 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힐끔힐끔 곁눈으로 작은 북을 치는 그 아이를 볼 수 있는 토요일 오후는 초등학교 6학년 박중훈 어린이의 최대 행복이었습니다.
◇ 어릴적 첫사랑의 떨림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제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서울 은평구 대조동을 떠나 상도동으로 이사오면서 가끔 동네에서 그 아이와 마주치는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초등학교 동창에게 전화를 걸어 그 아이의 근황을 물어봤고 몇 달에 한 번쯤 일요일이면 그아이가 다닌다는 교회앞에 숨어 멀리서 바라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사춘기 시절 제 일기장엔 저보다 차라리 그 아이가 주인공이었고 야구선수 문희수 투수가 TV에만 나와도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 아이 중간 이름이 ‘희’자 였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를 참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여름 초등학교 때 외웠던 그 아이집 전화번호 388―6XXX 번이 그대로인지 의심하며 전화를 걸었습니다. 깜짝 놀라며 웃는 그 아이와 그 주 토요일 오후 명동 코리아 극장 앞에서 만나 점심과 저녁까지 함께 하고 꽤 늦은 밤까지 맥주도 한두잔 마셔가며 지난 7년간 있었던 일을 신나서 이야기 했습니다. 기뻤고 예뻤습니다.
◇ 재회는 애틋함을 앗아가고
그런데 이상하게 그 다음날부터 눈을 감아도 그 아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아이를 보아버려, 눈을 감지 않아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매력있는 여자로 변해 있었지만 지난 7년간 제 가슴속에 있었던 기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때문에 가끔 장기간 지방 촬영이나 해외 촬영을 갈 때 저는 사랑하는 가족사진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수많은 아름다운 사진이 제 가슴속에 있는데 실제 사진을 보면 그 사진으로 가족들의 모습이 제한돼 마음 속 사진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행원이나 회계사의 일은 재삼재사 실체를 점검하고 확인해야 하겠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더 좋은 일도 있는가 봅니다. 그때 만나지 않았다면 제 마음속에도 어쩌면 얼마전 세상을 떠난 황순원님의 ‘소나기’같은 추억이 하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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