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초 일본 전역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이름하여 시멘스사건. 외국 회사와 관련해 장관과 고위장성들이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드러났다. 가차없이 검찰의 수사권이 가동됐고 그 서슬에 내각은 붕괴되다시피 주저앉았다. 엄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검찰은 수사 대상자들은 기소했고, 예심을 포함한 제1심 재판은 2년간 계속됐다. 그러나 그 선고의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무죄였다.
검찰은 경악했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수뇌들이 숙의한 끝에, 항소할 경우 공판을 담당할 고등검사 중 한 사람을 선정해 기록검토를 맡겼다. 그 검사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재판기록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항소기간을 하루 남겨두고 1심 판결이 옳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검찰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항소를 포기했다.
이렇게 소신있는 행동과 결단으로 일본 검찰은 국민의 신뢰를 쌓아왔다. 그것이 지금의 도쿄지검 특수부의 명성에까지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검찰은 어떤가. 비슷한 예를 들어보자. 지난 여름 6년을 끌어오던 경상대 교재 한국사회의 이해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무죄로 종결됐다. 검찰은 그 다음날 즉시 항소했다. 그 기민함에 놀랄 뿐이다. 도대체 왜 무죄가 선고됐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고민이나 해봤는지 궁금하다. 일단 항소해 놓고 보는 행위, 그 줄기찬 단세포적 관행의 행진 때문에 검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고비 때마다 정치권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해 일어설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재판사에도 세계적인 명장면은 있다. 2명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감옥으로 보내는 일이 어디 흔하랴. 하지만 그 때도 검찰은 두 차례의 불기소 끝에 막판까지 떠밀려 마지못해 기소했다.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특별검사제도도 마련됐다. 그러나 검찰은 형식적 협력으로 사실상 특별검사의 수사를 방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동안 고위층의 항명파동에 소장 검사들의 심상찮은 움직임도 느껴졌으나 곧 스러지는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시민들이 모이면 검찰은 정말 바뀌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최근에도 그런 말을 분명히 들었다. 이제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마치 증권시세에 대한 것처럼 분노의 감정으로까지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이 위기의 상황을 깨달아야 할 즈음에 또 사건이 터졌다.
왜 그런지 우리 정치의 파행은 항상 검찰을 끌고 다닌다. 국회 마비의 원인이 된 것도 지난 총선 선거비용 수사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수사자료가 특정 언론에 유출돼 망신까지 당했다. 그 불길은 어느 새 한빛은행 대출압력사건으로 옮아 붙고 말았다. 다소 엉뚱하긴 하지만, 이제 이 사건의 결말이 경색된 정국 돌파의 명분이 되고 말았다. 은근슬쩍 여야의 실질적 협상카드가 된 셈이기도 하다.
그 성공의 열쇠는 다시 검찰의 손에 쥐어졌다. 아니면 검찰은 순전히 도구로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 어쨌든 이번 사건이 이 지경까지 온 것도 전적으로 검찰의 공헌 때문이다. 일찌감치 예의 그 기민성을 발휘해 단호하게 조기 종결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늘 경험하듯이, 진실을 눌러놓으면 온갖 부작용이 파생된다. 전 신용보증기금 영동지점장 이운영씨는 도망다니면서 여러 실마리를 풀어놓았다. 이씨가 지목한 실세장관은 부인하면서 통화내용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거론하고, 다른 지점장들의 비리가 불거지고, 급기야 이씨가 사건 전말이 소상하게 기록된 일기를 공개하고 21일 검찰에 출두하겠다고 선언했다.
검찰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수사결과였지만, 결국 이씨의 등장으로 다시 수사를 하게 되었다. 이 우연찮은 기회를 검찰이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근원적으로 검찰의 재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검찰은 하루 빨리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단 한번에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신껏 수사해 결론을 내놓아도 관계자나 국민이 믿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이제는 검찰이 떠안아야 할 의무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최선을 다하고, 그러한 최선을 몇차례 거듭해 신뢰의 주춧돌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