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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준칼럼]먹구름 없애야 '햇볕' 보인다

입력 | 2000-09-20 18:56:00


제주도가 평화협상의 무대로 국제사회에 처음 각인된 것은 91년 4월 당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방문으로 제3차 한소 정상회담이 열림으로써이다. 날씨가 무척 맑았던 정상회담일 아침 고르비는 “이곳에 오니 얄타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얄타는 그때만 해도 소련에 속했으나 오늘날엔 우크라이나 땅인 크리미아 반도의 유명한 휴양도시다.

필자는 95년 ‘얄타협정 50주년 기념행사’에 해설자로 초청받아 처음 얄타를 방문하곤 고르비의 말이 사실 그대로임을 직감했다. 풍광이 비슷해 마치 제주도에 간 기분이었다.

고르비는 제주도에서 얄타를 느끼면서도 얄타가 한민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몰랐다. 2차대전이 끝나기 반년 전인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이 한반도에 관해 북위 38도선에서의 분단을 밀약하지는 않았으나 미소 공동지배체제를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한민족은 오랫동안 얄타체제에 발이 묶인 셈인데, 고르비는 필자와의 대담에서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진정으로 놀라워했다.

▼상호군축 첫걸음 제주도회담▼

90년대의 세계사적 격변 속에서 전후(戰後) 냉전질서의 큰 기둥인 얄타체제가 무너졌다. 얄타체제의 중요한 한 축이던 소련 자체가 해체되지 않았던가. 또 그 과정에서 얄타체제의 중요한 산물의 하나였던 독일의 분단이 해소되지 않았던가. 다만 역시 얄타체제의 또 하나의 산물인 한반도의 분단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 한민족이 세계사의 전개에서 얼마나 뒤져 있는지 다시 한번 개탄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의 얄타’ 제주도에서 ‘한반도의 얄타체제’를 깨뜨리기 위한 회담이 열리게 된 것은 자못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나흘 뒤인 25일 열릴 제1차 남북한 국방장관회담이 그것이다. 남북 정상이 6월15일 평양에서 발표한 5개항 공동선언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관한 명시적 언급이 없어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일단 지켜볼 만한 대상이 나타난 셈이다.

한반도 분단구조의 와해는 결국 상호 군비축소의 실현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제주도 회담이 상호군축으로 가는 긴 여정의 첫 출발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남과 북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부터 꼭 14주가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한반도 상황은 불만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으나 큰 흐름에서는 새로운 긍정적 국면을 열어 왔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그것은 분명히 ‘햇볕정책’의 결실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은 이렇게 높아가는가. 세론에 접해보면, 마치 며칠 전 태풍에 1년 농사의 결실이 큰 손실을 보았듯이, 국정혼란의 먹구름에 ‘햇볕정책’의 열매가 많이 손상됐음을 절감하게 된다.

한 달 전의 여론과도 무척 다르다. 정부와 여당이, 특히 청와대가 뭘 모르거나 설령 알아도 켕기는 구석 때문에 덮으려 한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다. 문제의 엄청난 금융비리에는 집권세력의 몇몇 실세들이 깊숙이 개입됐다는 의혹이 온 나라에 퍼지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계속 길어지는 의약분업 파동에 점점 어려워지는 기업과 서민들의 고통이 겹치면서, 나라살림에 먹구름이 잔뜩 뒤덮인 형세가 오늘의 그림이다. 먹구름이 크고 짙다보니 ‘햇볕’은 그 속에 가려 느껴지지 않는다.

▼국민의혹 대통령이 풀어줘야▼

이 대목에서 상기돼야 할 중요한 점은 정부의 ‘햇볕정책’은 앞으로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추진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는, 그리고 성사 직후의 얼마 동안은 투명성이 부족한 비공개 협상이나 정부의 극소수 요인들이 주도하는 일방적 결정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리라. 그러나 그 방식은, 특히 북한에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계속 베풀어야 하는 경우에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햇볕정책’의 성패 여부는 국민적 이해와 지지의 폭이 얼마나 넓혀질 것이냐에도 달려 있게 될 터인데, 내정 전반에 대한 국민적 의혹의 해소 없이 대북정책에 대해서만 따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는가. 대북정책에서도 이제는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보여야겠지만, 의혹을 받고 있는 몇몇 국내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나서서 서둘러 정직하게밝힐 것은 밝히고 자를 것은 잘라 먹구름을 없애야 할 때다. 워싱턴 DC에서

김학준h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