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부두르 사원
《인도네시아의 자바섬 한가운데 가파른 화산과 맞닿아 있는 기름진 평원에는 웅대한 불교사원 ‘보로부두르’가 우뚝 서있다. 그것은 영락없이 피라미드다. 높이와 크기에서 이집트의 대피라미드에는 미치지 못하나 정사각형의 밑변(111.5×111.5m)에다 9층 높이(42m)로 돌을 가지런히 쌓아 만든 계단식 축조물이니 피라미드임에 틀림없다.》
대피라미드에선 ‘등산금지’란 팻말이 걸려 있어 밑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나 ‘승방(僧房)의 언덕’ 보로부두르는 은근히 등산을 유혹했다. 정오의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보로부두르의 회랑 속으로 들어갔다.
보로부두르의 회랑은 매우 좁았고 양쪽 벽면과 난간에는 수없이 많은 부조(浮彫)들이 가득 차 있었다. 회랑의 폭이 좁은 것은 잰걸음으로 후딱 지나치지 말고 차근차근 뜻을 헤아려보라는 것 같아 도드라진 부조들에 눈길을 던지며 걸었다. 4층까지 이어진 부조의 대행렬은 2km는 족히 넘었다. 거기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비롯하여 생사의 윤회, 지옥의 고통, 극락의 즐거움, 그리고 해탈에 이르는 길 등이 이야기 형식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걸 이해하기가 그리 쉽진 않았다. 그렇지만 한가지 깨달은 것은 있었다. 궁극의 구원에 이르려면 눈을 한곳에 모아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 그건 폭을 좁게 하여 시선을 달리 둘 데 없도록 만든 회랑의 구조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대승 불교가 번성했던 9세기 중엽 만들어진 보로부두르 사원은 위에서 보면 화엄 만다라의 형상과 같다.
◇수평지향적 小피라미드
그런 득도(?)의 과정을 거친 데 대한 보상에서일까, 사각 구조의 회랑 코스를 빠져 나오자 탁 트인 전망이 펼쳐졌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고 등은 흥건히 젖었지만 벼 담배가 자라는 너른 들판과 그 너머로 구름 속에 고개를 감추고 있는 높은 화산 등 눈앞의 풍경은 상큼하기 그지 없었다.
보로부르드의 정상은 3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원형 테라스로 바닥은 완전 수평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 갈수록 조금씩 높아졌다. 시원한 전망을 선사하는 테라스라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흔히 말하는 대로 ‘무색계(無色界)’의 공간임을 상징하기 위함인지 모르겠으나 종(鐘) 모양의 불탑(스투파)만이 간격을 맞춰 서있을 뿐 아주 심플했다. 하긴 득도의 과정을 무사히 거쳤는데 무엇이 더 필요해 야단법석을 떨겠는가.
유려한 선(線)을 뽐내는 불탑은 제일 바깥 동심원 위에 32개, 그 안쪽에 다시 24개, 16개, 이렇게 모두 72개였다. 그리고 제일 안쪽, 그러니까 정상에는 커다란 불탑 하나만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기에는 연꽃 받침대 위에 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부처님이 계셨다. 피라미드 형식을 빌린 이 불교 건축물은 대승불교가 한창이었던 9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화산이 내뿜는 잿더미를 뒤집어쓰고는 천년이나 잠들어 있다 19세기초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부처님의 모습은 언뜻 보기엔 모두 똑같아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시선의 방향과 손 모양(手印)이 조금씩 달랐다. 똑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각자(覺者)는 각자(各自)였던 것이다. ‘이는 존재의 다양성, 나아가 개체의 존귀함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로부두르는 겉모습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축조된 대 피라미드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보로부두르의 층계구조도 ‘번뇌로부터의 초월’이란 관념을 상징하기 위한 것일 뿐 수직적 위계질서를 나타내려고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뾰족한 사각뿔 모양이 아니라 수평에 가까운 원형 테라스, 그리고 그 위에 줄맞춰 서있는 탑과 불상을 거느린 보로부두르의 지향점은 수평적 질서와 분산구조, 개체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각 기단과 원형의 테라스가 한데 어울려 만들어 내는 사원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과연 어떤 평면도가 될지를 생각해 보았다. 사각의 기단이 몇 겹으로 외곽을 두르고 그 안으로 또 몇 개의 동심원이 그려지니 아마도 화엄만다라가 될 것 같았다. 화엄만다라는 압축된 세계를 뜻하지 않는가. 그것은 또 ‘이 우주에는 어느 하나도 고립된 것이 없다. 그들은 서로 의지할 뿐 아니라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연기론(緣起論)’과도 연결된다. 원형 테라스 위의 불상은 독자적인 개체이나 고립된 존재는 아니며 서로는 서로에게 존재의 원인이 되는 존재의 주체들인 것이다.
연기의 세계는 모든 것과 네트워킹을 원하는 인터넷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인터넷이란 하드웨어는 20세기말에 등장했지만 그 아이디어는 이미 1000여년 전 만다라를 그리고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그들간의 인과관계에 주목하려 했던 대승불교에 의해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는 인터넷이 주도하는 21세기를 ‘신유목 사회’라고 하지만 나는 ‘신농경 사회’라 명명하고 싶다. 유목사회의 네트워킹은 ‘이익’을 추구하였는데 반해 지금의 인터넷은 상호 ‘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 대한 배려는 물론 다른 생물의 종과 환경까지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만난 사람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이 연기론의 세계다. 인터넷은 이런 세계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하는 바가 클 것이다.
◇21세기는 평등-개체의 시대
세상에는 두 개의 힘이 작용한다. 하나는 대피라미드로 상징될 수 있는 수직지향의 힘으로 ‘하나’ ‘권력’ ‘독점’ ‘조직화’ ‘통합’ 등을 추구한다. 다른 하나는 보로부두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평지향의 힘. 이는 ‘다수’ ‘개체’ ‘분산화‘ 자율성’ 등을 추구한다.
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 소비자주권, 문화다원주의, 생태계 보존, 인터넷 등이 중심개념으로 자리잡은 지금의 21세기는 수평지향의 힘이 단연 우세하다. 탈권력, 탈국가, 탈조직를 지향하는 ‘개체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독자성을 갖되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게을리 하지 않는 개체가 주인이 되는 시대가 이미 열린 것이다. 역사의 진보로 기록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권삼윤 tumina@hanm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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