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가까이 캐나다에서 살던 처남이 고국에 잠시 다니러 왔다. 대학동창들을 만나보려고 제 모교의 동창 홈페이지에 들어가 동기들을 찾고 있었는데, 그 방법을 몰라 아내와 처남은 한참을 끙끙대면서 낙담하고 있었다. 게시판에다 글을 올려 ‘사람을 찾습니다’라고 광고를 내라고 내가 한 수 거들었더니 처남은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다.
아니, 매부가 게시판 같은 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예전엔 매부 머리가 별로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머리가 굉장히 좋아졌네요. 그러자 아내가 되받아쳤다. 얘, 무슨 소리야? 너네 매부 요즘 인터넷 도사가 다 됐어. 마우스로 그림도 척척 그리고 못하는 게 없단다. 마우스로 너네 아버지 얼굴을 그렸는데, 막내이모가 보구선 ‘야아 박서방 천재야 천재’ 하면서 감탄했다니까…. 마우스로 그린 장인어른 프로필 크로키는 내가 봐도 정말이지, 거짓말 하나 안 보태서, 밀레나 르누아르보다 더 잘 그린 것 같아 ‘바탕화면’에 깔아드리고 온 일이 있다.
나는 처남한테 자랑을 펴보이기 위해 내가 꾸려가고 있는 인터넷 소설 창작교실사이트(novel21.com)를 열었다. 내 손으로 편집해 올린 한글파일들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퐁피두센터에 잠입해서 훔쳐와 ‘비밀창고’에다 감춰둔 거장의 그림들과, ‘소설 창작캠프’의 수강생들이 올린 리포트파일들까지도 일일이 열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처남은 마치 화성에서 날아온 신인류를 구경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부는 소설가인데 어떻게 이런 걸 다 해요? 천지개벽이 났나.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네요. 그러자 아내의 남편 자랑이 이어졌다. 너네 매부는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286이라구, 거 왜 있잖아, 흑백 13인치짜릴 썼댔어. 시인 작가들이 컴맹이 많다는데 너네 매부는 작가들 중에서두 단연 최첨단이란다.
신문 지면에 벤처 인터넷 기사가 실린 간지만 쏙 빼버리고 다른 지면만 골라 읽는 것이 버릇이 돼 있던 내가 어쩌다가 이 도도한 인터넷 물결의 꼬리나마 붙들고 떠밀려가게 변해 버렸는지 실은 나 자신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비디오 자동차 심지어 냉장고에 이르기까지 ‘새것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나와 가족들은 항상 막차를 타왔다. 가구들도 거의 다 이삼십년 전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니 아내 친구들이 구닥다리 인간이라고 놀리는 모양이다.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아이들은 컴퓨터를 만져보지 못했다. 그런데 용케도 10여년간 애지중지 끌어안고 지내던 그 흑백 고물 286컴퓨터와 결별하자마자 신문명의 이 끝물 인생 컨트리보이 작가에게 새로운 드넓은 평원이 펼쳐졌던 것이다.
내게 있어서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은 사뭇 달라졌다. 컴퓨터를 켜 E메일 우체통을 열어 내게 날아온 엽신들을 확인한 뒤, 창작캠프의 대문을 따고 들어가, 작가 지망생인 나의 귀여운 아가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로부터 나의 새벽이 열린다.
수년 전, 이중 커튼으로 꼭꼭 여며 한결 껌껌해진 내 작업실에 햄스터 쥐처럼 웅크린 채 지나간 청춘과 지나간 소설사랑의 나날들을 갉아먹으며 슬픔에 젖어 있던 나는 요즘 들어서 어느덧 혈기왕성하고 젊어졌다. 창작캠프 말고도 재미난 데가 있는데, 박상우 하성란 이순원 등등의 후배 소설가들이 애써 만들어 가꿔 놓은 아기자기한 쉼터(novelhouse.or.kr)로 이따금 슬슬 ‘마실’을 다녀오기도 한다. 거기 가면 선후배 작가들과 소설 좋아하는 독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캠프의 아가들에게 속으로 낄낄거리며 이렇게 호령을 내릴 것이다.
“여봐라 삼월아, 리포트 안 내고 농땡이치는 ‘솜틀집의 바람난 햇솜’을 ‘마을회관’ 느티낭구에다 꽁꽁 붙들어 매어라. 헛간에 가설랑 곤장을 꺼내오렷다…. 곤장 열두대!!!”
그러면 ‘햇솜’은 또 이렇게 애원할 것이다.
“오오 랍비시여, 제발 좀 살살 치소서. 친정 나들이 때문에 리포트가 늦었나이다.”
끝으로 한 목소리 하는 캠프 동지들의 아이디를 소개하고 싶어진다. 멍구, DJ 온돌공주, 탱자꽃, 남도댁, 매혹, 바랑쟁이 蓮花智, 豚頭, 눈동자, 딸기코, 미나삐…. 그밖에도 빼어난 미성(美聲)들은 많이 있다.
박영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