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양손엔 호주국기와 원주민기가 나란히 들려 있었다.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한 뒤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힌 그녀가 맨발로 트랙을 사뿐사뿐 밟기 시작하자 11만여 관중들은 “오시(Aussie·호주사람), 오시, 오시!”를 외쳤다.
모두 이날의 400m우승자가 ‘애보리진(원주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은 금메달을 위해 최선을 다한 한 명의 운동선수였을 뿐이었다.
25일 시드니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육상 여자 400m결승.
97, 99 세계선수권자 캐시 프리먼(27)은 생애 가장 힘든 레이스를 펼쳤다. 그녀에게 거는 호주국민의 엄청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두 발을 무겁게 만든 원인이었다.
좀처럼 레이스 도중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 프리먼은 결승선을 통과한 뒤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떠나갈 듯한 함성과 박수소리가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를 뒤덮었지만 그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듯 가빴던 숨을 간신히 고르기를 약 5분.
신발을 벗고 굳은살이 박인 맨발로 트랙에 나선 프리먼은 관중석에서 던져준 호주국기와 원주민기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94년 영연방대회 400m에서 우승한 뒤 두 개의 깃발을 들고 뛸 때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또다시 그를 손가락질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프리먼은 경기가 끝난 뒤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꿈을 이루게 돼 행복하다. 어떤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기회가 열려있다고 말하고 싶다”고 호주국민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졌다.
2000년 9월25일, 한 호주 원주민 딸의 꿈은 이렇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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