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문맥에서 ‘전후(戰後)’란, 단순한 시간의 가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전후’는 일종의 정신의 존재형식이다. 그것을 확실히 실감케해주는 것은 문학, 그 중에서도 시다.
‘전후’에 어떤 시가 가능했을까? 전쟁은 모든 표현을 불가능하게 하고 정지시켜 버렸다. 그것이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구가하는 서정시가 되었건, 근대의식에 찢어졌던 모더니즘이건, 계급의식을 고무하는 프로레타리아 시건 막론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예외없이 전쟁과 침략을 찬미하는 전쟁시만을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후시’는 이러한 시정신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전후시’의 출발은, ‘아레치(荒地)’라는 시인그룹이 주도했는데, 다무라 류우이치(田村隆一·1923∼88)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이다.
1500쪽에 이르는 ‘전시집(全詩集)’에는, 전후시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시집 ‘사천(四千)의 날과 밤’을 비롯해 ‘돌아온 나그네’에 이르기까지, 그가 생전에 펴냈던 28권의 시집 전부, 그리고 약간의 미간행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시 가운데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시집의 표제가 되기도 했던 ‘사천(四千)의 날과 밤’이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숱한 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숱한 사랑한 것을 사살하고 암살하고 독살하는 거다/봐라, /사천의 밤의 침묵과 사천의 날의 역광선을/우리들은 사살했다/…/이것은 죽은 이를 소생시키는 오직 하나의 길이며/우리들은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시구에서 알 수 있듯, 다무라 류우이치는 통렬한 부정과 반복되고 누적되는 단언의 수법을 통하여 관념 세계의 자립을 시도함으로써, ‘전후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다무라는, 이같이 거친 듯한 언어로 시간의 흐름에 그저 떠밀려 가는 것에 저항했으며, 언어만의 힘으로 현실에 맞서려고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는 다무라 특유의 격렬함은 자취를 감추고, 보다 여유있는 산문적 표현으로 바뀌어 간다. 말수가 많아지는가 하면, 이전의 긴장감은 엷어져 갔다. 이것은 시인 다무라의 변모이자, 또한 일본 ‘전후’의 변모를 충실하게 표상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변모를, 타락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숙이라고 보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대에 비판적인 시선과 전통적인 서정의 거부, 그리고 ‘말’로 ‘말없는 세계’ 발견하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었다.
‘내 주검에 손대지 말라/너희들 손은 죽음에 손댈 수 없다/내 주검은/군중 속에 섞여/비맞게 하라’(‘입관’중), ‘말 따위는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말없는 세계/의미가 의미로 되지 않는 세계에 산다면/얼마나 좋을까’(‘귀로’중)
▼'다무라 류우이치 전시집'/ 시조샤▼
이연숙(히토츠바시대교수·사회언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