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월화드라마 '아줌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장미와 콩나물'의 작가 정성주 선생님과 '보고 또 보고'의 연출자 장두익 선생님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작품이지요. '가부장적인 집안의 순종적인 가정 주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변신하는 코믹 홈드라마'라는 제작진의 설명처럼,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아줌마 오삼숙(원미경)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꾸 강석우 선생님이 맡은 아줌마의 남편 장진구에게 시선이 갑니다. 드라마의 내용과는 약간 동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는 어떤 개인적인 애증 때문이지요.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소위 말하는 386 세대입니다. 가장 나이 어린 후배로 나오는 강수환(김호진)이 89학번으로 나오지요. 80년대의 20대 청춘을 불꽃처럼 보내고 이제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인물들이 대학교에서, 까페에서, 카센터에서 등장합니다.
세기말을 넘기면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386'이라는 숫자가 새로움의 상징, 개혁과 희망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상징은 현실에 굳게 발 딛고 서지 않을 경우 단숨에 무너지고 맙니다. 올해 들어 그동안 386세대에게 향했던 높은 기대만큼이나 차가운 비판이 쏟아졌지요. 386 국회의원들의 광주 단란주점 해프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386의 정체성이 의심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성주 선생님은 '상징'이었던 바로 이 386들을 '현실'로 끌어내려 보여줍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가슴이 섬뜩할 정도지요. 고등학교만 나온 아내에게 무식하다며 큰소리나 치고 돈으로 교수 자리나 얻으려고 하는 386, 어머니의 생신 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외국여행을 나가는 386,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386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을 바라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그 실소는 곧 저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기도 하지요. 삶이 다 그런 게 아니냐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그 모두를 합리화시켜주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생님은 바로 그 젊은 날의 원칙을 잃어가는 386 세대의 전형 장진구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비겁하고 쫀쫀하며 서른일곱의 나이에도 부모에게 생계를 의지하고 조강지처를 속이면서까지 옛사랑 한지원(심혜진)에게 추파를 던지는 인물이지요. 동생 뻘 되는 30대 중반의 삶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잠시 추억에 젖어봅니다.
제가 선생님의 연기를 눈여겨 본 것은 1986년 영화 '겨울나그네'를 통해서입니다. 선생님은 그 영화에서 순수한 젊음의 열망을 지닌 '피리부는 소년' 한민우 역을 멋지게 소화하셨습니다. 한민우의 가슴 저린 사랑과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극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으니까요. 선생님은 로미오와 같은 비극적 미소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멋진 연기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선생님께 부담이 되었던 것일까요? 선생님은 그후로도 여러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셨는데, 심각하고 우수에 찬 멋진 표정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하는 남자주인공 역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디서나 선생님의 연기는 빛났지만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이미지가 고정된 주연배우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KBS 드라마 '학교'를 통해 놀라운 연기변신을 하셨지요. 선생님이 맡은 학생주임은, 영화 '여고괴담'에서 '미친 개'로 대표되는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교사가 아니라 문제아들의 고민까지 헤아리는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인자한 교사였습니다. 선생님은 곁눈질하듯 약간 치뜨는 눈초리 속에 미소를 담아 이 역을 훌륭히 소화해 내셨지요. 멋있기만 하던 주연에서 다양한 성격을 표현할 수 있는 조연으로 자리를 옮기신 겁니다.
그러고보니 선생님의 연기 역정과 386세대의 삶에는 비슷한 점이 하나 있군요. 눈부신 '상징'에서 평범한 '일상'으로 자리를 바꾼 것 말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연기 변화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찾으셨는데, 과연 386세대도 그럴 수 있을까요? '코믹 홈드라마'를 내세운 만큼 '아줌마'가 전개될수록 장진구는 더욱 웃음을 자아내겠지요. 하지만 그 웃음이 자기환멸이나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고, '학교'에서처럼,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면서도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웃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성주 선생님도 이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계시겠지만, 저는 강석우 선생님이 386 세대의 삶을 가볍게 웃기는 쪽으로만 연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청춘의 열망이 무너지는 것은 높은 이상 때문이 아니라 단단한 일상 때문이겠지요. 그 두꺼운 일상의 벽을 '아줌마'의 386들은 어떻게 부딪히고 좌절하고 끝내는 넘어서는지 지켜보겠습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강석우 선생님이 계시겠지요.
이 가을, 아줌마 남편 강석우 선생님과 함께 삶의 페이소스를 맛보고 싶습니다.
소설가 김탁환 (건양대 교수)tagtag@kytis.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