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 내기요. 자 쭉 내기요, 임선생!”
추석 특집 생방송으로 방영된 KBS의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진행하기 위해 지난달 6일 평양에 도착한 첫날 밤. 내가 처음 들은 말은 ‘쭉 낸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술자리에서 흔히 쓰이는 ‘원 샷’의 북한식 표현이었다.
그날 밤 보통강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에 이어 자연스럽게 마련된 술자리에서 나는 곤경에 빠졌다. 일행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내게 처음 만난 북측 안내원이 술 한잔을 ‘쭉 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집안 내력이 술을 거의 못하는지라 술자리는 아예 피하거나 어쩔 수 없어 참석해도 그저 마시는 척만 하는 정도다.
곤경에 처해 있는 내게 동행한 동료 프로듀서가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내 머리 색깔이 너무 노래서 북한의 풍속을 해친다며 당장이라도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검게 염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송 때문에 북한에 왔고 체제가 다른 곳이라지만 머리를 검게 염색해야 한다니…. 당황하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북한 안내원이 머리염색을 빌미로 술 한잔을 ‘쭉 내라’고 재촉했다. 다른 사람들도 ‘한잔 쭉 들이켜면 봐줄지 모르지 않느냐’며 은근히 거들었다.
나는 결국 그 독한 40도 짜리 들쭉술을 ‘쭉 내고’ 잔을 거꾸로 들어 털어 보이기까지 했다. 씩 웃으며 서 있는 안내원에게 “그럼 이제 머리문제는 해결된 거죠”라고 물었다. 그는 “아니, 그게 한번 생각해 보자니까…”라며 웃어 넘겼다. 그렇게 ‘신고식’을 마치면서 나는 ‘아, 검게 탄 얼굴에 억센 북한 사투리를 쓰는 이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나와 같은 민족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며 코끝까지 찡해졌다.
하지만 열흘간의 북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돌이켜 보니 남북한 사람들은 ‘술 권하는 문화’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가 같고 생김새가 비슷하고 그래서 같이 얘기하고 밥을 먹다 보면 쉽게 정이 들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은 우리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세기에 걸친 분단이 우리를 그렇게 다른 사람들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거리의 모습 하며 건물, 호텔방, 그 방에 있는 가구나 침구, 심지어 양철로 된 보온병 하나도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북한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우리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나는 북한에 있는 열흘 동안 늘 하던 일 세 가지를 전혀 하지 않고 지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고, 단 한번도 컴퓨터를 켜지 않았으며 자동차 운전도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이들이 결코 일상생활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이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두음법칙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리해’라고 발음한다. ‘리해가 안간다’ 또는 ‘리해를 해야 한다’는 표현이 대화 중에 너무 자주 등장했다. 그렇다. 정말 북한에 있는 동안에는 이해가 안되는 일도 많았고, 이해해야 할 일도 많았다. 앞으로 남과 북이 하나가 돼 같이 살아가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정말 많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의 이질화된 문화를 동화시키고, 서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뭐니뭐니 해도 영상대중매체인 TV방송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한의 중계차와 방송인들이 처음으로 북한에 들어가 북한 방송요원들과 함께 백두산 천지의 생생한 모습을 전국의 안방에 전달한 그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천지에 손을 담갔을 때 전해오던 그 짜릿한 느낌과 천지의 그 맑은 물로 끓여 먹은 라면 맛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남과 북의 방송사가 서로 손잡고 제작한 것인데도 ‘백두에서 한라까지’는 남한 시청자들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가까운 장래에 남북한이 공동 제작하고 출연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남북한 시청자가 동시에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다시 북한에 갈 기회가 온다면 그 때는 그들을 보다 진심으로 이해하고 넉넉하고 끈끈하게 보듬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