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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게 이렇군요]정치인들의 실언(失言)

입력 | 2000-10-01 18:53:00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의 실언은 종종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정보력이나 영향력으로 미뤄볼 때 단순히 ‘근거 없는 실언’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실언 파문이 의외의 사태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94년 서석재(徐錫宰)전 총무처장관의 ‘전직대통령 3000억원대 비자금보유설’ 발언은 노태우(盧泰愚)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지난해 진형구(秦炯九)전 대검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공로담’은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둘 다 술자리에서의 ‘취중발언’이었다.

최근 한나라당 엄호성(嚴虎聲)의원이 한빛은행 불법대출사건과 관련해 수배중이던 신용보증기금 전 영동지점장 이운영(李運永)씨측과 자주 접촉했다고 말해 ‘한나라당 배후설’을 자초한 것도 ‘취중실언’이었다.

전문가들은 “공명심이나 자기과시가 ‘취중 실언’의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즉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실언의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박정희(朴正熙) 정신분석’의 저자인 신용구 안양중앙병원 정신과과장은 “술을 마실 경우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약해져 무의식중에 자기과시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엄의원의 경우도 ‘한나라당 배후설’을 자초한 발언을 했을 당시 실제보다 부풀려서 자신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것이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얘기다.

선거비용 실사개입 의혹을 불러일으킨 민주당 윤철상(尹鐵相)의원의 발언이나 제주도를 ‘반란의 땅’에 비유해 물의를 빚은 한나라당 김기배(金杞培)사무총장의 발언은 취중발언은 아니나 역시 술자리와 관계가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비용실사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무대책을 공격하는 소속 의원들에게 “지도부가 사전대비한 덕분에 기소돼야 하는데 안된 의원이 10명은 넘는다”고 맞받아쳐 파문을 빚은 윤철상의원은 ‘결백에 대한 강박관념’과 ‘상황판단 착오’에 의한 실언 케이스로 분류된다.

발언 전날 술자리에서 선거비용실사 문제로 소속의원들과 논쟁을 벌인 것이 화근이었다는 후문. 이 자리에서 “도대체 지도부는 뭘 했느냐”고 일부 의원들이 항의하자 윤의원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라고 화를 냈다는 것.

술자리서 있었던 한 의원은 “윤의원이 전날 술자리 상황에 집착해 의원총회라는 공식 장소에 서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기배사무총장의 경우는 ‘스트레스성 실언’ 사례로 꼽힌다. 김총장은 ‘제주 반란’을 발설하기 전날 장외투쟁과 관련해 심야대책회의를 마친 뒤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져 ‘과로상태’에서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어진 것 같다는 분석인 것이다.

정치인의 경우 정치적 입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실언을 하기도 한다. 오랜 공백 끝에 정치에 복귀한 서석재씨의 ‘비자금 발언’이나, 최근 “당의 중심이 되겠다”고 말해 내부적으로 미묘한 파문을 빚은 민주당 모최고위원의 발언이 이같은 사례로 거론된다.

어떤 경우든 실언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신용구과장은 “무의식중에 나온 실언은 정치적 계산이나 고려가 작용하지 않아 오히려 진실성이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ys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