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영화는 오랫동안 '삼류'라는 편견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든 에로영화가 다 '삼류'였던 건 아니다.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흥망성쇠를 걸어온 에로영화의 역사. 부터 까지, 에로사극, 핑크무비, 하드코어 포르노의 은밀한 유혹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평론가 김의찬이 3주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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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에로영화는 아니지만 성(性)표현의 문제로 최근 화제를 뿌린 영화가 있다.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이다. 이 영화는 공개되기 전부터 니콜 키드먼과 톰 크루즈의 에로틱한 장면 등이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국내에선 한동안 개봉 여부가 불투명했으나 최근에야 비로소 공개되었다. 기실 엔 충격적인 장면이 있긴 하다. 집단 혼음을 비롯해 마약과 섹스, 그리고 일탈적인 행동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
■큐브릭이 그린 성적 판타지
뉴욕의 의사인 빌은 아내의 고백을 듣고 황망해한다. 아내 앨리스가 한 남성에게 육체적으로 강하게 끌린 적이 있으며 가정을 포기할 의사까지 있었음을 내비친 것이다. 당황한 빌은 길거리를 헤매고, 매춘부와 잠자리를 시도하기도 하며, 혼음 파티장을 방문하는 등 일탈에 대한 몽상에 몸을 적신다.
원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에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기로 이름이 높다. "사람들에게 무슨 의도인지 말해주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된다"는 철학을 지닌 인물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연출에 있어서의 완벽주의는 큐브릭 감독 연출작 전편에 흐르는 공통점이다. 그런데 은 조금 다르다. 그의 다른 영화보다 훨씬 직설적이며 솔직한 기운을 품고 있다.
결론에 이르러 은 일반적인 에로영화와는 대척점에 선다. 부부간의 애정을 중시하고, 가정 외부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도덕적인 훈계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하지만 톰 크루즈가 연기한 빌이 사창가를 헤매고 가면을 쓴 일군의 남녀가 난교 파티를 즐기는 등 충격적인 묘사가 영화 곳곳에 박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은 에서 성적 판타지의 극단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감독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방황을 고백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은 이나 와는 또 다른 경지, 즉 인간 무의식에 잠복해 있는 성적 에너지를 스크린으로 옮겨놓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거장이 던지는 성에 관한, 또 다른 길고 암시적인 보고서인 셈이다.
■핑크영화와 로망포르노
싸구려 에로영화에도 나름의 미학이 있긴 할까? 물론 있다. 적절한 예를 가까운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얼마 전 국내에선 한 영화제를 통해 흥미로운 영화들이 상영됐다. 일본의 '로망포르노' 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로망포르노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반 극영화적인 장치, 다시 말해 드라마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남녀의 섹스장면을 포함하는 영화장르를 칭한다. 일본에서 이 장르는 1960년대 영화시장의 40%를 차지했던 적이 있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에로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일본에서 로망포르노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일본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되기도 한다.
일본에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학생운동 열풍이 불었다. 전공투를 비롯해 여러 노선을 지향하는 각 단체의 시위와 데모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자 그런 변혁의 기운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혁명의 꿈이 사라진 것이다. 학교에서 제적당하거나 대학을 자퇴한 학생들은 자의는 아니지만 사회 체제 속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회를 제공한 것이 싸구려 영화판, 즉 에로영화 제작사였다.
당시 닛카츠 등의 영화사가 로망포르노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을 막 도입할 무렵이었다. 에로영화 제작사들이 연출 지망생들에게 요구한 사항은 간명했다. 다른 건 상관없으니 영화에 '섹스' 장면만 집어넣으라는 것이었다. 출세대열에서 탈락한 젊은이들이 에로영화 제작현장으로 뛰어들었고 미처 꺼내놓지 못한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 정치적 메시지를 거기에 녹여 놓았다. 당시 로망포르노 영화를 만들어 유명해진 감독으로는 와카마츠 코지, 구마시로 다츠미, 다나카 노보루 등이 있다. 대학 출신은 아니지만 와카마츠 코지는 정치적 구호를 에로영화에 섞어 넣은 대표적인 감독이다.
나 등 당시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면 선정적인 섹스 장면도 있지만 학생들의 시위를 비롯한 정치적 내용이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흐르고 있다. 로망포르노, 즉 싸구려 에로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사회 억압에 저항하려는 감독의 연출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던 셈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 연출자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이 로망포르노 계열의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의 수오 마사유키, 의 최양일, 그리고 의 구로사와 기요시에 이르기까지 최근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감독들은 이 싸구려 영화판을 출발점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했다.
흔히 에로영화를 'B급 문화'로 칭하기도 한다. 주류문화와는 구분되는 비주류문화라는 의미다. 일본의 로망포르노에서 알 수 있듯, 에로영화는 단순히 저예산으로 만들어지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장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주류문화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동시에 사회적인 함의를 충분히 지닌 장르인 것이다.
물론 모든 에로영화가 작품성을 지니고 있고, 완성도가 높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B급 문화, 즉 상대적으로 상업적인 면에서 부담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에로영화는 때로 정치적인 흐름과 나란히 움직이며 다른 장르의 영화가 시도할 수 없는 실험성과 과격함을 노출해왔다. 이것이 바로 에로영화를 싸구려이며 천박한 장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국 에로영화의 현황은 어떨까. 연간 제작되는 에로영화는 대략 150여 편. 전체 비디오 시장의 10%를 상회한다. 국내에서 에로영화는 주로 극장용 장편이 아닌 비디오용으로 제작된다. 비디오 카메라로 작업하고 배우들도 아마추어 수준이기 때문에 완성도는 떨어진다.
국내 에로영화는 '패러디 전략'에 의존하는 경우가 잦다. 일반 극영화가 히트할 경우 비슷한 제목을 따와서 어감이 유사한 제목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라는 영화가 성공하자 곧 이라는 에로영화가 등장한 것이 좋은 예다.(계속)
김의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