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때로부터 꼭 16주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남북회담 또는 남북관계에 몇가지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 회담은 여러 갈래로 바쁘게 열렸고 때로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알맹이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안들에 대한 매듭을 1차 회담은 2차 회담으로 미루고, 2차 회담은 3차 회담으로 넘기는 모습에 국민은 익숙해지게 됐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뒤 유럽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1815년 빈에서 열린 이른바 빈회의가 수많은 무도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열국 사이의 협상을 계속 진행시켰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않았던 것을 두고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는다”고 서양외교사 교과서들이 논평했던 것을 연상하게 만든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어떻든 볼거리는 많았고 수사(修辭)는 화려했지만 열매는 풍성하지 않았다.
▼경제지원 요구 점차 확대▼
둘째, 북한의 남한에 대한 경제협력의 요구가 여러 방면으로 확대되면서 그 액수도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비료 식량 전력을 비롯해 구체적으로 하나씩 둘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과연 남한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 앞으로 어느 선까지 연장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도주의 입장에서나 민족당위론의 시각에서나, 특히 남쪽의 도움이 남북관계의 개선과 화해를 가져오게 되리라는 기대에서도 북의 동포들을 도와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런 도움에서 남의 희생이 불가피하게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 문제다.
셋째, 북쪽은 논외로 하고 남쪽만 놓고 볼 때 정책결정이 여전히 투명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비밀스러운 부분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보도에 따르면 남북장관급회담의 남측 수석대표인 통일부장관조차 뭘 몰라서 “이런 식으로 해선 안돼”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니 지나치지 않은가. 북이 어떤 근거에서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또 남은 그 요구들에 어떤 근거에서 정확히 뭐라고 대답했고 무엇을 얼마나 준 것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줄 것인지 도무지 알기 어렵다.
밖으로 드러난 이런 현상들로 말미암아 정파적 색깔이 거의 없는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조차 비판이 높아간다. 초기의 감격과 감동은 냉소와 비판으로 대체돼 가고 있다. 여론조사의 응답에서 ‘잘한다’고 대답했던 사람들마저 “그거야 여론조사니까 그렇게 대답한 것이고”라고 비아냥거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북관계의 장래를 생각할 때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최근 북한이 보여준 두 가지 결정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며 북한군 총정치국장인 조명록(趙明祿)차수의 방미이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북으로서는 시급한 과제다. 미국으로서도 북의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는 일이나 주한미군에 관한 북 수뇌부의 진심을 파악하는 일은 모두 중요하다. 따라서 북한 권력구조의 실질적 2인자 또는 3인자 소리를 듣는 그의 방를 통해 상호이해가 성립돼 북―미 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열린다면 다행스럽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북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한 한반도의 군사와 평화 및 안전에 관한 문제들을 사실상 남을 소외시킨 채 북―미 대화를 통해 풀려는 종래의 정책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그 근거는 남북공동선언에 한반도의 군사와 평화 및 안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노동당 행사 南초청 시기상조▼
둘째,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남의 정부 정당 사회단체 및 개인을 초청한 것이다. 남북관계가 본질적으로 상당히 폭넓고 깊이있게 진전된 때라면 남북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창립기념일에 남북 관계자들이 서로 오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노동당 창당 기념일이 10월 10일이니 초청치고는 너무 촉박하고, 초청양식도 정중하지 못하다. 또 남쪽 내부에서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워지는 ‘북한논쟁’을 격화시킬 수 있다.
결국 북쪽이 남북관계와 관련해 보여주는 모습들은 남쪽의 입장을, 특히 대북화해론의 대변자이며 실천자인 남쪽 정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북쪽이 진정으로 남북대화를 바란다면 남쪽의 대북화해론이 입지를 잃게 해서는 안된다. 남쪽에서는 정부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동의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북쪽이 알아야 할 것이다. 북의 태도 때문에 남쪽에서 국민여론이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쪽으로 대세를 이루면 북을 위해서도 불행해진다.
김학준h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