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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테마무비]금지된 장난, 전쟁터의 유희들

입력 | 2000-10-05 11:53:00


아주 사소한 실수도 어이없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쟁터. 하지만 그 아수라장 속에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한적한 유희를 생각한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전쟁터에서 '금지된 장난'을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전장의 호모루덴스'는 르네 클레망 감독의 (52)이다. 동화에 반전영화를 곁들인 에서 어린 꼬마 폴레트는 2차대전의 폐허 속을 떠돌며 죽은 동물들의 시체를 모은다. 그 놀이에 참가하는 은밀한 동료는 마이클. 소년과 소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저 세상으로 떠난 동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데, 그들은 마치 삶과 죽음에 달관한 것처럼 심오한 소꿉장난을 즐긴다.

가끔씩은 떳떳한 군인의 신분으로 합법적인 장난을 즐기는 자들도 발견할 수 있다. (87)의 애드리안. 그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무더운 전장에 울려 퍼지는 미군 라디오방송의 DJ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의 입담(100퍼센트 로빈 윌리엄스의 즉흥연기에 의한 것이다)은 군대의 권위주의를 비웃으며 촌철살인의 멘트에 금지곡을 곁들여 타향에서 명분 없는 전쟁에 휘말린 불쌍한 병사들에게 작은 활력소를 제공한다.

그러나 애드리안의 장난은 (99)의 망나니들이 저지른 행동에 비하면 작은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걸프전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 번의 전투도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미군들이 포로의 항문에서 한 장의 지도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후세인이 금을 감춰 둔 벙커의 지도. 아치 소령을 필두로 뭉친 미군들은 군대를 이탈해 금을 찾아 떠나는데,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운반이 문제였다. 이 과정에 이라크 반군이 개입하면서, 그들의 '황금빛 장난'은 인간의 생명이 걸린 생생한 현실로 변한다. 모름지기 '장난은 장난'으로 끝나야 하는 법. 는 전쟁터에서 장난이 과할 때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역설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휴머니즘이라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전해주는 영리한 영화다.

전쟁터의 즐거움들 중에서 위문공연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79) 병사들이 보여준 광기에 가까운 환호성은 조금 문제가 있다. 미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앞세워 돈으로 '처발랐던' 베트남 전쟁. 미군들은 전쟁터에서도 미국 본토의 생활 수준과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바비큐 파티를 하고 윈드서핑을 즐기며 유유자적한다. 전쟁터에서 수고하는 국군장병 아저씨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플레이보이 클럽의 토끼 마크를 달고 날아온 헬리콥터에서는 무희들이 선녀처럼 내려오고, 'Susie Q'의 퉁퉁거리는 전기기타 리듬에 맞춰 야시시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군인들은 발정난 개처럼 흥분하고, 감동적인 우정의 무대를 펼치려 했던 위문공연 팀은 황급히 보따리를 싼다.

이처럼 전시와 평상시를 구별하지 못하는 미군 특유의 여유(?)는 (70)에서 극에 달한다. 한국전쟁이 배경인 의 의무장교들은 전쟁보다는 악동 같은 장난질에 더 관심이 있다. 상관의 은밀한 사생활을 메가폰으로 전군에 방송하고, 샤워중인 여군에게 창피를 주는 그들의 악취미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78)처럼 전쟁이 다 끝나고도 러시안 룰렛을 멈추지 않거나, (98)처럼 전쟁광 장난감들이 등장하는 영화들도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전쟁터의 유희'를 보여준 영화가 또 한 편 있다. '공동경비구역JSA'.

공기놀이, 닭싸움, 손 밀치기, 끝말잇기, 몽고씨름….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전쟁도 아닌 평화도 아닌 '휴전'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이 지배하는, 공화국 계급 전선의 최전방이자 남한 자본주의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그곳. '공동경비구역JSA'는 그곳을 무장해제하고 놀이터로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의 상상력은 아직 위험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아직 총을 풀어헤쳐 던져 버리고 그곳에 들어갈 용기가 없는 것일까? 이 영화에 수백 만의 관객으로 호응한 대한민국의 '일반관객'과 영화의 사실성에 대해 거의 미학적 수준의 딴지를 걸고 나선 'JSA전우회' 사이의 관점 차이는, 이 영화를 '즐거운 유희'로도 '냉엄한 역사'로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