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성(性)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주초에 ‘또 하나의 문화’ 주최로 이화여대에서 열린 영화 ‘로망스’시사회와 여성의 성에 대한 토론회를 보고 난 뒤 갖게 된 의문이다.
프랑스 여성감독 카트린느 브레이야의 논쟁적 영화 ‘로망스’(21일 개봉)는 연인인 폴로부터 섹스를 거부당한 여주인공 마리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좇아 나선 여정을그렸다.
사실 여성의 성욕을 그렸다해도 여주인공이 파국을 맞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여성이 평생 남성의 성기를 갈망하는, 거세된 남성에 불과하다고 비하한 프로이트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로망스’에서는 시종일관 마리가 자신의 욕망을 성찰하며 쾌락을 추구한다.
이날 토론은 ‘여자는 사랑없이 섹스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보여준 이 영화가 여성이 성적 주체로 설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데에 동의하는 방향으로 모아졌다. “여성의 몸이 타자의 욕망이 경합하는 장으로 제공되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장으로 돼야 한다”는 것. 그러나 성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는 유의미하지만 도대체 그게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답을 얻지 못했다.
영화에서 마리는 연인에게서 받은 정신적 학대를 다른 남자에게서 배운 성적 마조히즘을 통해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기꺼이 ‘객체’가 되기를 감수하는 이같은 ‘이열치열’도 성적 주체 확립을 위한 각성이라 볼 수 있는 건가?
올해 초 개봉된 영화 ‘섹스:애너벨 청 스토리’에서 애너벨 청이 여성의 성욕을 표현했다고 주장해도, 카메라의 시선안에 갇힌 그는 성욕의 대상인 ‘객체’였을 뿐이다.
성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 그러나 어떻게? 모호한 토론 틈새에서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는 한 토론자가 소개한 이화여대 화장실 벽 낙서였다. ‘그와 만난지 100일이 돼도 키스를 세 번 밖에 못했는데 그것도 다 내가 리드해서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한 토론자는 “주인공 마리가 섹스를 거부당했다고 수치심을 느끼는 건 자기 존중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러나 남자주인공 폴처럼 여성을 욕망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으로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이 사회가 성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는 마리나 화장실 벽 낙서의 주인공이 자신의 성욕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여성의 성욕을 전면에 내세운 ‘로망스’가 주는 현실적 메시지는 이날 사회자의 말마따나 성에 관한 한, 여성에게 “이성애는 슬프다”는 확인에 그치고 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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