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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출판통신/파리에서]알바니아에 꽃은 언제 피나?

입력 | 2000-10-06 18:37:00


알바니아 출신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파리 망명 생활 10년만에 처음으로 공산정권 몰락 후 알바니아 모습을 그린 소설을 최근 완성했다. 이 소설을 낸 화야르출판사는 알바니아 문학을 세계적으로 알린 그의 소설, ‘부서진 사월’과 ‘꿈들의 궁전’에 버금가는 걸작이라며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카다레는 1936년에 알바니아 남부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유학 생활을 거쳐 1962년 첫 소설 ‘죽은 군대의 장군’으로 알바니아 최고의 문학적 명성을 획득했다. 검열을 빠져나가기 위해 작품들을 수정해야 했음에도 오스만 터키 제국의 전제 군주가 신하들 꿈까지 감시하는 내용의 소설 ‘꿈들의 궁전’(1982)은 그 배경 도시인 이스탄불이 알바니아 수도를 환기한다는 이유로 발매금지 당했다.

1990년10월 알바니아 공산 체제가 무너지기 바로 몇 달 전, 그는 파리로 망명했다. 그후, 10편이 넘는 작품을 썼지만 단 한편의 소설 속에서 공화제로 바뀐 알바니아를 부분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알바니아를 1년에 두세번씩 방문 관찰하면서 1998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올해 마친 이 소설은 작가의 고국에 대한 가장 신선한 감수성을 표출하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2000년 여명, 알바니아 북부의 한 작은 도시. 반세기를 지배했던 공산 독재 이데올로기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거리에, 그동안 듣지 못했던 기이한 이야기들이 떠돈다. 뱀과 결혼한 처녀가 행복하게 사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뱀은 밤이면 아름다운 남자로 변하여 사랑을 하고, 아침이면 다시 뱀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뒤엎힌 세상에서 까마득한 전설이 현실로 불쑥 다가왔다.

또 피의 복수를 정당화하는 관습법, ‘카눈’이 반세기의 겨울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난다. ‘카눈’은 공산치하에선 금지되었던 옛 관습이다. 이제는 아무도 레닌의 이념에 목숨을 바치려하지 않으나, 대신 가문이 흘린 피는 몇 세대를 지나서라도 피로 복수를 해야한다는 가족적 신념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카눈’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한 인물은 공산주의 추락 후 기대했던 나라가 오히려 쇠퇴하고 물질적 가치관이 범람하자, “유일한 희망은 옛 관습의 부활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다른 복수를 부르는 이 관습 또한 부조리한 행위로 그칠뿐이다. 그리고 서구의 덧없는 유행들도 새로운 풍습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이 혼돈 속에서, 젊은 화가 마르크는 현재를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바라 본다. 그러나 인간 세계가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신들에게 비치듯이, 사랑하는 자신의 모델이 그를 단지 필요의 대상으로 볼 때, 또 세계적 기구의 흐름에 알바니아 관습법이 무력해질 때, 그에게 땅은 신들이 버린 파괴적인 공허로 보일 뿐이다.

망명작가의 눈에 비친, 혹독한 겨울을 지낸 ‘알바니아의 봄’은 다시 찾은 자유가 꽃으로 피어나기엔 아직 너무 싸늘한 것 같다.

▼'사월의 차가운 꽃들'/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화야르출판사▼

조혜영(프랑스 국립종교연구대학원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