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동유럽의 공산 정권을 차례로 무너뜨렸던 ‘피플 파워’가 마침내 유고연방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영원할 것 같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권력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국민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민심 이반의 원인은 민족주의를 내세운 잔인한 ‘인종청소’, 그 결과 자초한 국제적인 고립, 이에 따른 생활고였다.
밀로셰비치는 90년대 초중반에 걸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를 지원해 타민족과의 전쟁을 도발했다. 지난해 초 코소보에 거주하는 알바니아계에 대한 잔학무도한 대량학살은 밀로셰비치의 가장 큰 범죄였다. 이로 인해 유고는 국제사회의 이단아로 몰렸다. 급기야 경제제재가 시작됐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폭격기는 지난해 3월부터 78일간 유고 전역을 공습했다. 교량 도로 정유공장 등 사회기반시설의 대부분이 파괴됐으며 민중은 하루하루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민심은 급변해갔지만 밀로셰비치는 이 같은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민족의 영웅으로 열광적으로 지지해주던 시절만 기억했던 것이다. 야당의 비판이 거세지자 밀로셰비치는 내년 7월까지 대통령 임기가 보장되는 데도 헌법을 고쳐 조기선거를 실시했다. 정치적 지지를 과신한 나머지 당연히 재신임될 것으로 생각한 것. 10여년간 집권의 무기가 되어온 ‘민족주의’를 내세워 외세―민족주의 대결로 이끌면 쉽게 승리할 것으로 여긴 것이다.
미국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눈엣가시 같던 밀로셰비치를 제거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인접한 헝가리에 야당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사무소를 차렸다. 유세기간 중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정권이 교체되면 유고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유고 국민에게 야당후보를 찍도록 부추겼다.
지난달 24일 대선 결과는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기대와는 달랐다. 당황한 집권층은 결선투표→선거무효 등 편법을 동원하며 권좌를 연장하려 했으나 국민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야당의 총파업 계획에 동참한 시민은 연일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밀로셰비치는 끝났다”고 외쳤다. 광원 버스운전사가 파업에 동참하며 도시 기능이 마비됐다. 파업과 농성, 시위해산에 투입된 경찰과 군대마저 주민 편에 가세했다.
새 정권이 수립되면 유고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될 것으로 보인다. 밀로셰비치 퇴진과 동시에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경제제재를 해제할 것은 틀림없다. 따돌리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발칸의 화약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유고에 대해 도로교통시설의 복구, 공장 재건, 식량과 의약품 공급 등 각종 지원을 활발히 벌일 것으로 보인다.
lailai@donga.com
▼유고사태 외국 반응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서방 국가는 유고연방 세르비아공화국 민중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봉기한데 대해 6일 이를 일제히 환영했다. 밀로셰비치에게 우호적이던 러시아와 중국도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에게 대통령 당선 축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서방국가들과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러시아는 이날 외무장관을 베오그라드에 보내 야당지도자 코스투니차와 밀로셰비치대통령을 연쇄 접촉하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서방국가들과 달리 유고의 반정부 시위에 대한 평가를 유보해온 러시아는 사실상 코스투니차를 유고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급파한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은 6일 베오그라드에 도착, 코스투니차와 회담을 가진 뒤 “대선 승리에 대한 축하의 말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바노프는 밀로셰비치와 접촉했다.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는 6일 러시아가 망명처를 제공할 것이란 서방의 관측과 관련해 “전혀 논의되고 있지 않다”고 일축했다.
▽미국〓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러시아가 코스투니차를 유고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인정한 것을 ‘놀라운 소식’이라며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6일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유고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러시아가 코스투니차의 대통령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서방국가 대열에 참여한 것을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국가〓의장국인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세르비아 국민이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다”며 “EU를 대표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폴란드를 방문중인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세르비아의 민중봉기는 세르비아 국민만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승리”라며 밀로셰비치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유고군이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라며 유고 군경에 대해 무력 사용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EU는 9일 긴급 외무장관 회의를 소집, 유고에 대한 경제 제재를 논의할 예정이다.
▽중국〓밀로셰비치를 강력히 지지해온 중국 정부는 6일 유고 사태에 대한 그간의 침묵을 깨고 ‘유고 국민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 외교부 쑨위시(孫玉璽) 대변인은 이날 “중국은 유고 국민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며 유고가 조속히 안정을 회복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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