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서 쫀쫀해졌다고 난리죠 뭐. 그놈의 돈이 뭔지, 사람 성격 다 버렸어요."
모은행 계장인 김모씨(32)는 평소 동료들과의 술자리만 있으면 "내가 쏠게"를 연발하며 호방하게 카드를 그어대던 '통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달 평균 70만원에서 많으면 100만원까지 쓰며 '김 화통'으로까지 불렸던 김씨는 휴가를 마친 8월말부터 하루 용돈을 5000원만 쓰는 초긴축 생활을 시작했다.
"경제가 하도 어렵다고 하니 불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금융권 구조조정도 곧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장래가 불안하니 저축이라도 해야죠."
젊고 실적이 좋은 편이어서 아직 구조조정 대상은 아니라는 김씨. 하지만 김씨는 "직장에서 나같은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적지 않다. 하루 용돈이 5000원인 사람들끼리 모여 5000원 클럽 을 만들자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김씨 같은 초긴축 생활을 시작한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월급이 깎였거나 소득이 갑자기 줄어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겪어본 이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갖고 있다. 경제가 또 안 좋아진다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식으로 '저축부터 늘이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 특히 아내가 관리하는 가계와는 별도로 자신만의 '비자금'을 준비, 불안한 장래에 대비하려는 회사원들이 적지 않다.
9월부터 한달 용돈을 10만원으로 과감히 줄인 회사원 최만식씨(35)는 요즘 동료들 사이에서 '왔다갔다 족(族)'으로 통한다. 지하철로 회사에 출근한 뒤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때우고 일만 하다가 바로 퇴근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부 회식 등 자신이 돈 낼일 없는 모임에는 참가하지만 개인적인 술자리는 완전히 피한다. 자신이 돈을 안내더라도 한번 남에게 신세를 지면 언젠가 나도 사야한다는 부담이 생기기 때문에 아예 술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씀씀이 크기가 1000원 단위로 줄어드니 매일 뽑아먹던 자판기 커피값도 아깝다. 대신 최씨는 매월 40만원씩 적금을 붓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는 30대 들어 일자리 한 번 잃으면 끝입니다. 아무런 복지 대책도 없는데다 사회적 인식도 실직자를 패배자 로 보는 경향이 강해요. 경제적으로 뭔가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죠."
최씨는 지난 여름 해외여행객이 사상 최고를 기록하는 등 부유층의 과소비가 늘고 있다는 최근 보도에 "경제가 안 좋아지면 우리 같은 중산층 회사원만 죽어나는 거죠 뭐"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경기 악화가 또다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전형적인 'IMF식 소비패턴'을 낳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여정성(余禎星)교수는 "경기 침체가 계속될 것으로 보는 중산층이 늘어나면 소비가 더 위축될 수 있으며 그것이 나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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