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은 위대했다. ‘발칸의 도살자’로 알려진 유고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시민의 손에 의해 드디어 권좌에서 쫓겨났다. 군용차량과 뒤섞여 독재의 종말을 자축하는 시위대의 행렬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시민항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굴복시킨 바 있는 우리에게는 유고의 베오그라드에서 날아온 무혈혁명 소식이 더욱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독재권력은 속속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페루의 리마에서 독재권력은 붕괴되거나 위기에 봉착했다. 민주화를 향한 ‘제3의 물결’이 9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서서히 퇴조하고 있다는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진단과 달리 지구촌에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열망이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그 열망의 결과는 위태로워 보인다. 루마니아, 러시아, 폴란드가 시민혁명 뒤에 어떤 역경을 거쳐왔는가를 돌이켜보면 충분할 것이다. 그 역경의 원천은 주로 경제적인 문제에 놓여 있다.
세계경제의 관리자를 자처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총회가 열렸던 9월 말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는 시민운동 단체로 구성된 ‘반세계화’ 시위대가 집결했다. 세계화의 또 다른 축인 자유무역과 경제통합을 겨냥한 선진자본국들의 발빠른 행보를 저지하기 위한 힘겨운 몸부림이었다. 그 시위대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청장년 시민운동가들로 뒤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소수의 풍요와 다수의 빈곤을 은폐한 채 경제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하는 세계화동맹(G7)의 척후병에게 육탄으로라도 시민 의사를 전달한다는 공통된 목표로 뭉쳐 있었다. 이런 광경은 프라하가 처음은 아니었다. 작년 세계무역기구(WTO) 총회가 열렸던 미국시애틀에서 세계시민단체의 연대시위가 성공한 뒤 글로벌 경제를 주도하는 국제기구들은 세계 시민파워의 공격 대상이 돼왔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은 세계화동맹이 촉진하는 정치적 경제적 원리이다. 그런데 양자는 현실영역에서 자주 상호모순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중후진국의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성취하자마자 시장개방을 통해 선진자본과의 무한경쟁 상태로 돌입해야 함을 깨닫는다. 시장개방과 자유무역의 단기적 결과는 극단적인 사회분절과 계층갈등이며 어렵사리 유지해온 사회안전망의 전면 축소로 나타난다.
이 경우 국가가 선택할 여지는 현저하게 좁혀지며 그런 만큼 민주주의는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상호모순적 결과를 해결할 임무가 국가도 민간기업도 아닌 제3섹터로 자연스럽게 이전되고 있는데 말 그대로 자발적 조직 외에 어떤 공식적 권력과 체계적 기제도 갖추지 않은 시민들로서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시위하는 것 말고 효과적인 방법이 묘연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시민파워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자아내는 상충적 결과를 두고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것이 베오그라드와 프라하에서 최근 발생한 목적이 서로 다른 시위 행렬의 배경에서 읽혀지는 공통적 고민이다.
한국의 시민운동도 이런 딜레마에 갇혀 있는가? 한국의 시민운동은 민주화 이후 권력을 견제하고 개혁정치의 성공을 위해 범시민적 지혜를 모아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경제난국의 와중에서 비판의 방향을 잃고 제 몫을 못한다는 느낌도 든다. 민주적 명분에 집착하면 경제가 더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정 2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거세진 정부의 독단적 정국운영을 시민들이 어디까지 방관할 것인가? 정부가 시민단체에 끌려가는 것도 곤란하지만 시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항간에는 김대중대통령이 정책능력이 없는 비전문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거나 집권초기와 달리 민심의 향방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표명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대우와 한보 매각 실패에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거나 경제난국을 돌파할 대안은커녕 구태의연한 정책을 답습하고 있는 것, 시민생활에 어떤 부담이 더 갈지 해명 한마디 없이 금융개혁에 40조원의 추가 투입을 감행하는 것 등이 그런 우려를 자아내는 항목이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국정 전반에 대해 느끼는 시민들의 고뇌를 정확히 읽어주기 바란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