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자를 하면서 몇 번의 해외영화제 취재 기회가 있었다. 한국 언론이 다루는 영화제는 대개 칸, 베니스, 베를린 같은 세계적인 영화제다. 그런데 행사 기간 동안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그곳은 외국 기자들에게 절대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워낙 많은 나라에서 파견된 정체 모를 언론사들의 취재 경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세계 제1의 권위를 자랑하는 칸영화제는 일반 관객들보다 각국에서 파견된 외신 기자들이 더 많이 영화제의 열기를 띄운다. 영화제 기간 만큼은 칸의 국적이 모호하게 느껴질 정도다. 따라서 칸영화제가 열리는 크로와제트 거리를 걷다보면 동서양 온갖 종족들이 연출해내는 무국적 판타지를 쉽게 맛볼 수 있다.
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첫 항해를 시작했을 때, 기자는 내심 해외영화제에서 느꼈던 그 무국적 판타지를 맛보고 싶었다. 명색이 국제영화제니 그 정도는 돼야 마땅한 것 아니냐고 쉽게 단정지어 버렸다. 하지만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제의 이름에서 '국제'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집안 잔치' 수준이었다.
관객들의 열기는 해외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으나, 외신 기자들의 취재 경쟁은 확실히 미약했다. 당시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찾아온 외신 기자들은 10여 명 남짓에 불과했고, 그들 역시 프로그래머와의 친분 때문에 참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확실히 예년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 거리는 전국에서 모인 한국의 영화 마니아들과 외국 사람들이 뱉어내는 낯선 언어들로 온통 뒤섞여 있다. 영화관에 가도 낯선 이방인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기자 회견장에도 이런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온 외신 기자는 약 100여 명. 게스트 및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은 외국인들이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전 세계 수천 명의 외신 기자들이 북적대는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것은 정말 고무적인 현상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드디어 '국제영화제'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쑥스럽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그 동안 줄곧 지적되어 왔던 관객들의 편식 증세도 많이 줄었다. 일본영화에 대한 편식이 심했던 과거의 모습과 달리, 이번 영화제에선 모든 상영작이 골고루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특별한 화제작은 줄었지만 대부분의 극장들이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있으며, 영화 상영 후 감독과 갖는 대화 역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숱한 화제를 모으며 시작됐던 동경영화제가 초반의 열기를 이어가지 못한 채 점점 규모를 축소해나가는 모습을 우리는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부산국제영화제는 해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고급 관객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열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화와 함께 호흡하고 뛰어 다니는 그들에게 좀더 좋은 영화를 공급해주기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앞으로 더욱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이제 안정궤도에 오른 이 영화제가 좀더 관객들을 사랑하고 해외에서도 사랑 받는 영화제가 되길를 바란다.
황희연 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