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이니까 방송기자 초년병 때의 일이다. 안면이 있는 한 방송사 간부의 추천으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인 여자 신인을 취재했다. 방송경험이라고는 겨우 2번의 MC 경험 밖에 없던 풋내기였지만, 청순함과 원숙함을 갖춘 깔끔한 미모와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그녀의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는 "지금껏 찍은 여자 연예인중 가장 완벽한 얼굴을 가졌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 매니저와 함께 딸의 취재를 지켜보던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들으며 너무 흐뭇해했다.
그때 기자와 사진기자를 놀라게 했던 그 앳된 여고생이 바로 김희선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기자는 당시 만났던 세 명과 전혀 반갑지 않은 문제로 만나고 있다. 바로 '누드집 파동' 때문이다.
사진작가, 출판사, 매니저, 연기자가 엉킨 '김희선의 누드집 파동'이 법정 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기사를 통해 접한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아무리 요령있게 쓴 기사라고 해도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니 어지러울만도 하다.
아직 법원의 판결이 나오질 않았으니 어느 쪽이 진실인지 섣부르게 판단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동안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당사자들의 언행들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우선, 한 해에 CF와 출연료로만 수십억원을 벌어들인다는 당대의 톱스타와 그의 매니저가 정확한 매니지먼트 관계가 명기된 공식적인 계약서 한 장 없이 8년 동안 지내왔다는 게 이상하기만 하다.
상대에 대한 신뢰감으로 함께 일을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막상 이번 일처럼 민감한 문제가 발생하자, 양측은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놓고 심한 갈등이 벌어졌다.
애초부터 매니저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권한이 명확하게 정해졌고, 그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할만한 공식적인 계약절차가 있었다면 매니저가 도장을 무단으로 찍었다며 계약 무효를 주장하거나, 합의서에 매니저 계약을 유지하는 조항이 들어갔다고 문제를 삼을 일이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중계약서가 등장하게 된 배경도 각 분야의 '프로'들이 모여서 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프다. 먼저 매니저나 사진작가 조세현씨측의 주장에 따르면 '김희선 어머니의 반대를 우려해서'라고 한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8년째 연예활동을 하는 프로 연기자가 자기 의사로 계약을 하는데,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계약서를 이중으로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반대가 무섭다면, 나중에 화보집이 세상에 나올 때는 어떻게 달랠려고 했을까?
반대 경우가 맞다고 해도 이해가 안가기는 마찬가지이다. 김희선측의 주장대로 자신들은 모르는 상황에서 이중 계약서가 작성됐다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계약 당시만 속이면 이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아무리 사진작가가 평소 '선생님'으로 부르며 존경하는 사이라고 해도, 그렇게 속인 사실이 촬영 현지에서 드러났을 때 선생님의 '권위'로 해결할 수 있었을까?
평소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기로 소문난 김희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특히 평소 '사제지간'이라고 말해온 사진작가가 그런 식의 어설픈 편법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누드 촬영이 절실했을까?
어느 한 쪽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납득이 안가는 일들이다. 이보다 더 답답한 것은 사건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절친한 사이처럼 말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원수 사이가 되는 모습이다.
초반에 공식 기자회견 외에 상대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조심하다가 사건이 법정분쟁으로 비화되자, '한번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의 극단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상대방 사무실을 찾아가 듣기 민망한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하는 장면이 기자들에게 공개돼 망신을 사는가 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얻기 위해 몰래 비디오로 촬영을 하다가 당사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위기에도 처했다.
신인 때부터 지금까지 8년간 동고동락한 매니저는 자신이 키운 연기자의 어머니로부터 '사기꾼'이라는 욕설을 들은 것을 억울해 했고, 곱게 키운 딸을 대스타로 만들어준 은인이라고 늘 사람들에게 매니저를 고마워 했던 어머니는 지금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고 한탄한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이 와중에 어부지리를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일부 언론사에 한 매니저가 앞으로 자신이 김희선의 일을 볼 것이라며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 이를 안 전 매니저는 모든 것이 자신을 떨쳐내려는 "그 XXX의 음모론"이라고 흥분했다. 한 연예인 단체는 법적분쟁중인 사건에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하고, 인터넷에는 '김희선의 아프리카 누드'라는 정체불명의 사진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사태가 이 지경으로 시끄러운데 정작 당사자인 김희선은 영화홍보를 위해 중국으로 떠난 후 돌아올 생각을 안한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 일정이 끝나도 국내에 있지 않고 외국에 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고생을 함께 한 매니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말하던 사진작가와 지금 천하에 둘도 없는 원수 사이가 된 상황에서 그녀는 문제의 해결을 모두 어머니에게 맡기고 한국에 없다.
이렇다 보니 연예가에는 '화보집의 판매를 극단적으로 높이기 위해 양쪽이 꾸민 고도의 전술이다' '김희선이 매니저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람과 계약을 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등 별별 희한한 소문까지 나오고 있다.
정작 개탄할 일은 이런 사태가 한국 연예계가 자랑하는 당대 최고의 여자스타, 그를 스타로 키워낸 거물 매니저, 스타들의 매력을 사진에 담는데는 국내 최고라는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연예계니까…'라며 그냥 웃고 지나가긴 영 뒷 맛이 개운치 않은 모습들이다.
김재범 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