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 또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 14일 부산국제영화제 대미를 장식할 폐막작이자 21일 전국 개봉될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제목이 뜻하는 그 아름다웠던 시절을 먼 훗날 돌이켜 보는 듯한 추억과 향수, 아련한 회한의 정서가 뒤섞인 우아한 영화다.
홍콩 왕자웨이(王家衛)감독의 최근작인 ‘화양연화’는 현란한 카메라의 움직임, 불연속적인 편집방식을 구사하던 ‘중경삼림’ 등 그의 전작들과 달리 고전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감독은 영화와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을 줄 만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다루는 왕자웨이 감독의 손길은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졌다. ‘화양연화’에서 왕자웨이와 여섯 번째 작업을 한 촬영기사 크리스토퍼 도일은 안정된 앵글 속에서 잦은 클로즈업과 정지 화면, 슬로우 모션을 통해 주연인 장만위(張曼玉)와 리앙자오웨이(梁朝偉)가 펼치는 쓸쓸한 사랑을 세밀하게 스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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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 뒷얘기
1962년 홍콩. 무역회사 비서 리첸(장만위)부부, 지역신문 편집장인 차우(리앙자오웨이)부부가 한 아파트 이웃에 나란히 이사를 온다. 리첸의 남편은 출장이 잦고, 호텔 직원인 차우의 아내도 자주 집을 비우는 탓에 리첸과 차우는 늘 혼자다. 골목에서, 아파트 계단에서 자주 부딪히던 이들은 서로의 넥타이와 핸드백을 통해 자신들의 배우자가 몰래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서로의 쓸쓸함을 달래주던 리첸과 차우의 만남은 조금씩 변주되면서 사랑에 이른다.
이 영화에 리첸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빛바랜 소품과 아름다운 감각의 총화와도 같은 장면들은 모두 리첸과 차우의 깊은 외로움, 머뭇거리며 지연되는 이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집중돼 있다. 리첸의 단정한 원피스와 차우의 깔끔한 정장은 아무 일 없는 듯 보여도 가슴 속에 고통을 안고 사는 이들의 절제된 사랑을 보여준다. 느린 속도로 전개되는 영화이지만, 대사와 상황엔 유머가 배어있어 보기에 지루하지 않다.
여러 번 다짐하듯 “우린 잘못되어선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이들은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은 열정적인 욕망의 뒤섞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결국 회한으로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4년뒤 차우가 앙코르와트의 버려진 사원에서 벽에 난 구멍에 오래도록 무언가를 속삭인 뒤 진흙으로 봉하는 장면. 진흙에선 풀이 자라고, 낡은 사원의 천장과 벽돌은 그 안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듯 아련하기만 하다. 바라볼 뿐 잡을 수는 없는 과거의 추억, 이 영화에 깊게 스민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는 언뜻 자기 땅에서 유배된 홍콩인들의 노스탤지어를 떠올리게도 한다.
늘 영화 음악 선곡에 탁월한 안목을 발휘해온 왕자웨이답게 냇 킹 콜의 스페인어 음반에서 뽑은 노래 ‘Quizas, Quizas, Quizas’는 마치 사랑을 불러오는 주술처럼 등장인물들의 주변을 부드럽게 맴돈다. 18세이상 관람가.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