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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가출 청소년에 대한 진실한 보고서

입력 | 2000-10-13 17:48:00


은 임상수 감독이 발로 뛰며 쓴 시나리오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를 연출할 때도 실제 여성들의 성적 체험을 취재 노트에 꼼꼼히 기록했던 그는 이번에도 10대 아이들의 삶에 무장(?) 침투하는 용기를 보였다.

가리봉동에 안경 노점상을 펼쳐놓고 생활하기를 1년 여. 그가 가출 청소년들이 몸을 눕히고 있는 싸구려 방에서 함께 먹고 부대끼며 얻어낸 결론은 이런 것이다. "나쁜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을 따라할 뿐이다."

임상수 감독과 아이들의 우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이 영화는 가출 청소년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아직 성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의 서툰 정사를 담아내면서도 자극적인 화면은 애써 피해갔다.

의 카메라는 가출 청소년들의 집합소라는 가리봉동을 거의 빠져나가지 않는다. 가리봉동 달동네에 위치한 허름한 방 한 칸. 그곳에 머물고 있는 가출 청소년에겐 나름의 사연이 있다. 어릴 적 근친상간의 아픔을 경험한 새리, 쉴 새 없이 두들겨 맞으며 자랐던 창, 대책 없는 자유주의자 아버지를 둔 탓에 빗나가 버린 한, 잠깐의 불장난으로 낙태를 경험한 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온 란. 이들 네 사람은 창녀, 원조교제, 일수놀이, '삐끼' 등 온갖 어둠의 세계에 기생해 번 돈으로 하루 하루를 버틴다.

영화는 이들이 왜 이 허름한 유곽 같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구구 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나누는 몇 가지 대화와 상황을 통해 암시적으로 그 이유를 알려줄 뿐이다. 말로 모든 걸 설명해버리는 B급 청춘영화에 비하면, 이것은 산뜻한 설정이다.

그러나 이들 네 명의 아이들이 한 울타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일견 고루하다. 한이 10대 청소년들에게 윤간당할 뻔한 새리를 구해준 인연으로 그녀의 집에 얹혀 살게 된 것이나, 창이 염치없는 '마초' 기질을 발휘해 사랑하지도 않는 란의 집에 눌러 살게 된 것 등이 그렇다.

어린 나이에 동거를 시작한 그들은 어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막 나가지 않는다. 어릴 적 근친상간의 경험이 있는 새리는 '나쁜 잠'을 한사코 거부하고, 한은 그런 그녀에게 섹스를 보채지 않는다.

'나쁜 잠'을 자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동거에 들어간 한과 새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희망을 안겨주는 캐릭터다. 반면 이들의 옆방에 머물고 있는 란은 "몸을 함부로 굴리는" 대책 없는 소녀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창에게 몸을 주고, 마음을 주고, 돈까지 내준다. 이 지점까지 은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10대 청춘영화의 코드를 그대로 따라간다.

그러나 네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장면부터는 60년대 할리우드 로드무비에서나 담아냈을 법한 스산한 아픔이 담겨지기 시작한다. 꿈을 잃은 아이들이 떠나는 여행길은 물론 서글프다. 그들이 애써 찾아간 바다엔 바다가 없고, 쓰레기 더미와 진흙이 뒤엉킨 황량한 갯벌만 있을 뿐이다. 이 보여주는 이 황량한 갯벌은 퇴락한 세상에 대한 은유.

지난 밤 아픔을 덜어내는 섹스로 희망의 단초를 발견한 그들은 그러나 이런 절망의 상황을 희망으로 성큼 돌려세운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놀이를 즐기는 그들은 때묻지 않은 천사와 닮았다.

영화는 청춘영화와 로드무비를 결합시킨 이 황량한 이야기에 카리스마 넘치는 새 살을 덧붙인다. 창은 딸을 집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란의 아버지에게 멋지게 주먹 한 방을 날려버리며, 한은 본드를 불고 있는 새리의 포주에게 라이터 불을 던진다.

눈물이 메말라 버린 네 명의 상처 입은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때론 징그럽게 느껴지는 10대들의 보고서다. 하교 길, 교복 입은 아이들과 역행해서 걸어가는 네 아이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도권적 폭력이 '나쁜 아이들'을 얼마나 더 생뚱맞은 천덕꾸러기로 만들고 있는지를.

원래 '나쁜 잠'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됐던 이 영화는 선정성만 빼면 여러 모로 와 닮았다. 가출 청소년들의 일상을 다큐멘터리적인 영상으로 포착한 점도 그렇고, 그들의 삶을 실제와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잡아낸 점도 그렇다.

처음 임상수 감독은 장선우 감독이 그랬듯 실제 가리봉동에서 만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험부담을 안고 영화를 만들겠다는 제작자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그는 기성배우가 아닌 신인을 기용하는 것으로 제작사와 적당히 타협했다. 길거리에서 캐스팅 된 의 주인공은 한달 여 동안 가리봉동에서 실제 합숙훈련을 거친 끝에 촬영에 투입된 초보 배우들. 그러나 그들의 연기는 기성 배우들을 주눅들게 할 만큼 무르익어 있다.

반면 주류 영화 최초로 100% 디지털 촬영을 시도한 이 영화는 디지털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려주는 데 절반의 성공만 거뒀다. 형광 조명 아래에서 찍은 신들은 모두 필름의 깊은 맛을 살리지 못한 채 얇게 떠있으며, 줌 아웃 신들은 필요 이상으로 흔들거린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적인 영상을 보여주려는 이 영화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필름 스타일에 익숙해 있는 관객들에게 의 불안정한 카메라는 어색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러나 디지털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10대 청소년들의 삶을 진솔하게 조망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이 영화는 선정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합격점 이상이다. 은 이 영화의 주연 배우들이 강조했듯, '왜'가 있는 인 셈이다.

황희연 benot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