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상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의미한다. 정의의 단순함에서 느껴지듯이 사상사는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하는 데 일견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어권에서 사상사는, ‘과연 현재에 존재하는 우리가 과거에 존재했던 사상으로 접근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접근이 가능하다면 가장 적절한 방법이란 무엇일까’라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에 관한 많은 이론적 질문이 제기돼 온 분야이다.
이미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상사방법론은 역사학, 철학, 언어학, 포스트모더니즘, 인류학, 문예이론 등 다양한 현대의 이론들이 모두 참여하는 지성의 광장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분야이다. 이렇게 볼 때, 다양한 현대의 이론들이 창궐하는 곳이자 이미 상당부분 타자화된 전통의 재해석 요구에 시달리는 곳인 한국의 지성계에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버클리대의 소장 정치사상 교수인 마크 베비르가 쓴 이 책은 이제껏 존재해 온 여러 방법론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고 나름의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책이다. 그 외에도 해석학적 전통에 기대어 시도됐던 기존의 많은 방법론과는 달리, 분석철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과들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이 책의 특징은 어떤 사상사방법론이 가장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실적 제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대답에 대한 섬세한 철학적 증명을 꾀했다는 점에 있다.
이 책은 러브조이 이래의 자율적 사상사, 사회경제사의 반격, 지성사의 등장,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등 사상의 역사적 이해를 둘러싼 영미학계의 100년에 가까운 논의의 연장선에서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자, 그러한 논의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기능할 수도 있는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미 유럽사회과학 역사학회를 비롯한 여러 학회들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저명한 미국지성사 연구가인 하버드대의 클로펜버그 교수는 이 책의 탁월성을 칭찬하며 기존의 사상사 방법론 저서 중에 최고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