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마르소
연극과 영화의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관객의 시선을 둘 지점을 누가 선택하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의 경우는 그 지점을 감독이 선택해 주는 데 반해 연극은 관객이 스스로 선택한다. 그런데 극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개방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의 경우는 갖가지 유혹을 좇느라 여념이 없는 관객의 시선을 일단 퍼포먼스의 현장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조차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다양한 퍼포먼스 눈길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지적했듯이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 같이 보편적인 감정 이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보편적 감정 이입이 쉽게 이뤄지는 원초적 선정성이나 폭력성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선정성과 폭력성은 그 자체의 강력한 흡입력 때문에 본래 의도한 의미의 전달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보편적 감정 이입을 통한 감동을 포기한다면 가능한 방법은 각자의 이해 관계나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통로를 통해 감동에 다가가도록 하는 것이다.
제3차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를 전후해 펼쳐지는 ‘아셈 기념축제’는 연주회 전시회 뮤지컬 민속공연 영화제 학술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아셈의 서울 개최를 축하하며 관객의 시선을 아셈에게로 끌어 준다.
이런 다양한 문화행사 중 어디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놀랍게도 또 다른 오프닝 퍼포먼스가 마련됐다. 아셈 개최를 코앞에 두고 서울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도로포장 퍼포먼스는 모든 서울 시민이 ‘아셈’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다.
이 못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은 아셈 개최를 일주일 앞두고 발표된 김대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다. 지금까지의 예비작업이 모두 노벨상을 위한 것인지 아셈을 위한 것인지 혼동될 지경이지만, 분명한 것은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을 포함한 아시아 유럽 26개국의 정상이 모여 김대통령의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퍼포먼스가 주는 감동은 스태프의 준비와 함께 연기자의 연기와 관객의 상상력과 관심이 결합돼 만들어진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인 메인 퍼포먼스에는 뭔가 강렬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 때 감동은 마치 긴 겨울 뒤 굳은 땅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듯, 오랜 준비 끝에 ‘불쑥’ 솟아 나온다. 노벨상은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상당’ 수준의 공정성과 권위를 유지하고 발표 직전까지 보안을 지키며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 모은 상태에서 정확히 예고된 시간에 관객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드러낸다. 이렇게 노벨상 퍼포먼스는 아셈 퍼포먼스를 압도한다. 화려한 축하 공연이나 많은 스타들의 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클라이막스에 기대되는 ‘내용’이다.
◇노벨상 축하의 자리 될듯
기대와 예측은 과거의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다. 아시아와 유럽의 결속을 통해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제동을 걸겠다고 모인 아셈의 지난 1, 2차 회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게다가 정치에 식상하고 경제에 힘 빠진 국민들에게는 또 하나의 정치행사일 뿐인 이번 아셈에서 보편적 감정 이입을 기대하기 어렵다.
러시아의 위대한 연출가이자 배우였던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공연 세 시간 전부터 나타나 준비를 하며 초조해 하는 배우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의상과 분장을 완벽하게 준비한 것 같군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정신도 씻기고 옷 입히고 화장시켰나요?”
그런데 아셈은 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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