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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스크린 비추는 한줄기 빛처럼…

입력 | 2000-10-19 18:47:00


극장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모든 불이 꺼진 뒤 스크린을 비출 빛 한줄기를 숨죽여 기다릴 때다.

영화가 나를 속일 때조차, 미처 알지 못하던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이 어둠은 얼마나 아름다운 기만인가.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 가끔 ‘시네마 천국’의 조그만 극장, 사자 입에서 토해져 나오던 푸른 빛이 생각나 고개를 돌려 영사실 쪽을 바라보곤 한다. 저 안의 또 다른 알프레도 아저씨와 토토는 무슨 생각을 할까.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찾아가 본 영사실은 정작 영사기계 돌아가는 소음만 요란했다. 비좁은 영사실을 35년간이나 지켜온 영사기사 이중기씨(53·종로 코아아트홀).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영화가 좋아 ‘OK목장의 결투’같은 서부영화를 보려고 자형이 일하던 영사실을 노상 들락거리던 소년은 열여덟살에 신촌 신영극장에서 영사기사 일을 시작했다.

나는 소음이 거슬렸지만 그는 가끔씩 말을 끊고 소음에 귀기울였다.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이상한 지 알 수 있다는 그는 하루 종일 영사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처지인데도, 탄소봉을 떼고 필름 릴을 20분마다 한 번씩 갈아줘야 했던 예전보다 많이 편해진 거라고 한다. 한 번은 5권짜리 필름 순서가 바뀌는 바람에 죽은 신성일이 살아나 당황한 적도 있지만, 관객들은 킬킬 웃고 휘파람을 불며 기다려주기도 했다. 옛날 이야기를 신나게 하던 그가 미소를 지우고 한 마디 툭 던진다. “이제 우리 시대는 지나갔지,뭐.”

지난주 부산국제영화제에 온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이 “앞으로 5년 뒤면 영화 제작부터 상영까지 디지털 혁명을 겪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 것처럼, 사람 손길이 필요없는 디지털 영사기는 영사기사라는 직업 자체가 사라질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관객들이 영화를 만나게 해주는 마지막 역할을 하는 우리도 똑같이 책임을 나눠지는 예술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지만, 이씨는 젊은 사람이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오면 말린다고 한다. 슬프다기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바람은 “영화가 계속 사람을 울리고 웃겼으면 좋겠다”는 것.

영화에도 불어닥친 디지털 혁명은 수많은 제약에서 영화를 훨씬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이지만, 나는 영화 한 편에 스민 땀과 노고가 영화 그 자체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영사기계의 소음에 가려 소리는 안들릴지언정 화면만으로 수천편의 영화를 봐오며 행복했다던 영사기사 이씨의 바람처럼, 영화가 변함없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또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를!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