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희숙 정보라 옮김/ 412쪽 1만5000원/ 길
우리에게 똘레랑스(tolerance·관용)는 외래어인가?
“해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여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다.” 고대 로마의 시마쿠스는 종교적 관용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서 이렇게 썼다. 이것은 이 책의 명제이자 똘레랑스의 출발점이다. 이미 17세기부터 국제주의의 기풍이 강한 네덜란드에서 태어났고 또 국제주의의 도시인 뉴욕에서 활동한 저자의 지적 배경은 이미 똘레랑스의 배경이기도 하다.
생존을 향한 전면적이고 단일한 욕망이 지배하는 원시공동체 사회에는 똘레랑스도 앵똘레랑스(intolerance·불관용)도 없다. “똘레랑스를 향한 투쟁은 개인이 발견된 후에야 시작”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공동체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집단명제가 불관용을 정당화한다. 민족주의 가족주의 지역주의 등의 모든 집단 이데올로기가 타자를 배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한국 사회의 공동체 물신주의에 대한 저자의 첫 번째 경고이다.
공정함과 정의에 대한 자기 확신 또한 “한 명의 독재자가 있는 세상을 두 명의 독재자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 뿐이다.” 종교개혁가들이 공유한 신념이나 혁명의 선각자들에게서 얻는 교훈이다. 자기 ‘확신’이 적정량의 자기 ‘의심’과 섞이지 않을 때, 그것은 불관용의 또 다른 터전이 된다.
나치즘 파시즘 맥카시즘 스탈린주의는 모두 불순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순수’와 ‘명분’ 좋아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저자의 두 번째 경고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적인 불관용’도 바로 자기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 연인들은 작지만 완고한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공동체가 갖는 철저한 ‘우리’ 의식이 상대방의 개인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부언하면, 확신에 찬 사랑이 불관용을 낳기도 하는 삶의 역설을 이해하는 데서 똘레랑스를 향한 걸음이 시작될 것이다. ‘사적인 불관용’과 ‘공적인 불관용’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똘레랑스는 늘 지성이 풍부하게 발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는 저자의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이상 장렬하게 전사하려는 투지가 아니다. 삶의 역설을 되돌아보고 똘레랑스를 이해할 수 있는 현명함이다. 공적인 똘레랑스가 여전히 외래어일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에 저자가 주는 교훈이다. 사적인 똘레랑스를 못 갖춘 이 세상의 연인들에게도….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