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러브 스쿨에 가봤어?” 요즘 20대 30대 사이에는 인터넷을 통해서 동창생을 찾는 것이 대유행이다. 주말이면 서울의 신촌이나 강남역 같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아! 옛날이여”를 읊조리는 동창회 모임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지난 주말에는 대학로에서 여러 초등학교의 동창회가 대규모 문화행사와 함께 열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런 동창회나 반창회에서 몇 년 만에 아련한 추억 속에 남아 있던 첫사랑을 찾았다는 사람도 많고, 그게 꼬투리가 돼서 본의 아니게 ‘깨지는’ 연인들도 꽤 있다고 한다. 아련한 추억 속의 연인이 현재의 연인을 밀어내 버리는 꼴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KBS에는 사람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두개나 된다. 유명인사들이 주로 첫사랑이나 은사님, 그리고 은인을 찾는 프로그램인 ‘TV는 사랑을 싣고’와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아침마당’의 수요일 고정물인 ‘그 사람이 보고 싶다’가 그것이다.
나는 이들 두 프로그램과 모두 인연이 있다. 예전에 진행했거나 지금 참여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지난해 ‘남과 북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8월15일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특별 생방송’까지 정말이지 ‘사람 찾기’ 프로그램과는 인연이 깊어도 꽤 깊은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양한 ‘찾기’와 ‘만남’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사람 찾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 하나, 바로 ‘나’를 찾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은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을 되찾게 해준다. 학교의 복도 저 끝에서 걸어오는 그 애의 갈래머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푹 숙이고 못본 척하고 지나쳤던 ‘나’. 지금은 비록 화장실 변기에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아서 아내에게 휴지 좀 갖다 달라고 소리치는 뻔뻔한 중년 남자일지라도, 기억의 창고 한 구석에 그렇게 동화 같은 추억의 페이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에 끼어 있는 먼지와 때를 한 겹 닦아내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쌀 한 됫박, 연탄 두 장을 사들고 불꺼진 셋방으로 돌아가던 퇴근길에 불을 붙이라며 아궁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을 내어주던 주인집 아주머니와의 만남.
그것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지금 정도나마 갖고 누리며 살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확인하고 자족하는 작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제는 한 집안의 가장, 아이들의 엄마가 됐다고 하더라도 홀로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온 사람들은 나이를 아무리 먹었어도, 설령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기필코 그 혈육을 만나려고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싶다는 것이다.
부모가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생년월일은 언제이며, 고향은 과연 어디인지 하는 것들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찾고, 그 낱낱의 조각보들을 퍼즐처럼 끼워맞춰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눈만 뜨면 신조어들이 등장하는 시대. 새로운 세기의 총아라고 불리는 컴퓨터 속의 신세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이른바 N세대들까지도 그 속도에 발을 맞추기는커녕 흉내를 내는 것조차 벅차다고 느끼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숨이 차고 힘들게 세상살이를 하다가 잠깐 멈춰 서게 될 때, 우리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을 돌이켜보게 된다.
어리고 느리고 어설프게 걸어온 지난날의 발자국과 그 곁에 나란히 찍힌 다른 이의 발자국들을 겹쳐봄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회귀! 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그리운 이름 찾기, 과거 찾기에 대한 집착은 더욱 더 강해지고 끈끈해지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과거로 회귀하는 시간의 열차를 타고 가는 퍼즐게임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