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 이세돌 3단- 백 유창혁 9단
이세돌 3단은 나른해 보였다. 생애 첫 도전기 첫판. 초반엔 두터운 형세였지만 우변과 좌상 중앙에서 몇차례 실족해 판을 망쳤다는 생각 때문인지 기분이 상한 듯 했다.
원래 속기 바둑인 이3단이지만 복잡한 듯한 장면에서도 반상에 떨어지는 돌의 속도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장면도]
백 1이 유창혁 9단의 실착. 그러나 흑2로 좌변을 살린 것이 성급했다. 이 수는 흑 4에 먼저 둔 뒤 좌변 흑 석점을 살리는 수와 ‘가’로 단수쳐 백 두점을 잡는 수를 맛보기로 해야했다. 그럴 경우 백 7처럼 중앙 흑대마가 죽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반면 상대인 유창혁 9단은 110여수부터 초읽기에 몰리면서도 느긋한 표정. 낙관파인 그는 좌변을 두툼하게 차지한 뒤 이미 승부는 끝났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승부는 두 대국자의 비관과 낙관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장면도를 보자. 두 대국자는 이미 더이상의 승부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형세는 생각만큼 한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이 아니었다.
백을 든 유창혁 9단이 유리한 것은 분명했지만 중앙에서 흑의 ‘생떼쓰는 수’에 한발 물러선 바람에 흑이 한걸음만 더 따라잡는다면 아주 미세한 형세.
이 때 반상에 떨어진 백 1은 유9단의 낙관이 빚은 헛발질이었다. 이3단에게 다가온 마지막 찬스. 시간도 1시간이상 남아 있었다. 중앙 흑대마, 좌변, 상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더 끈질기고 신중하게 물고 늘어져 뭔가 실마리를 잡아야할 대목이었다. 그러나 승부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 이3단은 이를 무심결에 외면했다.
두 대국자 누구도 백 1과 흑 2를 두는 사이에 승부의 추가 오락가락 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그냥 흘러가는 수처럼 여길 뿐이었다. 결국 중앙 흑대마가 몰살하면서 제8기 배달왕전 도전5번기 1국은 유9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국후 복기 대화.
“흑이 엄청나게 불리해서….”(이세돌 3단)
“응. 좌변을 백이 지킨 이후에는 승부가 안돼….”(유창혁 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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