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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쓸쓸한 미소로 기억되는 가객 김현식

입력 | 2000-10-27 18:41:00


11월1일은 사랑을 노래했던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그리고 술을 좋아했던 싱어송 라이터 김현식이 하늘로 간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는 90년 그날 간경화로 서른 두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우연하게도 그와 함께 음악 활동을 했던 고 유재하도 87년 같은 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지난 96년 그가 생전에 병상에서 기타를 치며 소형 녹음기에 기타를 치며 노래했던 테잎을 복원한 '다시 처음이라오' 와 이듬해 열성팬이 녹음한 라이브 앨범이 발표된 이후 김현식은 아쉽게도 우리의 기억에 잊혀져가고 있다. 과연 김현식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를 다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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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사랑 내곁에

  - 다시 처음이라오

"어디쯤 왔을까. 얼만큼 걸었을까. 옮겨진 발걸음을 또다시 옮길까. 서러움 애써 달래 보려고 이만큼 걸었건만 이제는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다시 처음이라오".

그가 죽음을 앞두고 힘겹게 읊조렸던 '다시 처음이라오'를 듣다보면 아직도 그가 살아있는 듯 한 착각에 빠져든다. 예전의 힘에 넘치고 터질 듯한 고음은 간데 없고 가래 끓는 목소리건만 그의 혼(魂)을 다한 열창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생전에 그를 몰랐던 사람이라도 김현식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외로움을 타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다. 그 외로움은 멜로디로 또 그의 걸걸하면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달됐고 그의 죽음 뒤에도 '내사랑 내곁에'가 100만장이 넘는 밀리언셀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다. 김현식이라는 뛰어난 보컬리스트에 대한 추억이 자꾸만 흐려지기 때문이다. '들국화' '신촌블루스'와 함께 80년대 언더그라운드계를 호령했던 그가 이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아련하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현식은 과연 어떤 가수였을까? 그와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은 김현식을 '오직 음악만 생각했던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동료뮤지션은 "현식이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친구였어요. 그래서 술과 담배를 많이 했죠. 후배 가수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것은 외로움을 많이 탔던 그 나름의 애정표현이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후배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몽땅 털어줄 정도로 정이 많았으니까요"라고 말한다.

김현식이 직접 만들고 불렀던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을 따 전태관과 같은 이름의 그룹을 조직해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는 김종진은 "짓궂게 장난을 많이 쳤던 형이었어요. 남모르게 배고픈 후배들에게 돼지고기를 사다줄 정도로 잔정이 많았죠"라며 "보여줄 게 더 많았던 형이었는데 너무 빨리 떠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동료 가수 강인원은 그를 '음악 천재이자 보헤미안'이라고 추억했다. 엉뚱한 행동을 곳곳에 퍼뜨렸던 피에로였고 고통과 아픔을 노래로 표현했던 혼의 뮤지션이라는 것이다.

'내사랑 내곁에'를 작곡한 오태호는 "88년 지방 콘서트 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김현식 선배님이 '내사랑 내곁에'를 듣고는 '나 줄래?' 하시기에 '그러세요' 했던 기억이 새롭다"며 "노래에 빠져들게 되고 색깔이 느껴지는 음악을 추구했던 분"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그의 소속사였던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여리고 눈물이 많았던 가수"로 기억한다. "처음 그를 본 사람은 광기 있고 건방지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사실 우리 기획사 출신 가수들이 현식이에게 한번쯤은 다 맞아 봤을 겁니다. 그래도 그 만큼 계산적이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진 뮤지션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의 저자 육상효 씨는 이 책에서 "거대한 세상은 김현식 이라는 순결한 영혼에 매일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들은 조금씩 그의 생명을 흠집으로 갉아먹었다"면서 "그는 자신과 관련 없는 세상의 불의에도 늘 상처받는 가슴을 지닌 약한 사람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현식이 추구한 음악은 '소울과 블루스'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사랑노래'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파하면서 눈물짓는 그런 사운드라고나 할까. 아마도 그의 음악은 32년 동안의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대변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 부유했지만 외로웠던 인간 김현식

58년 1월7일 서울 인현동에서 2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현식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충북 옥천 갑부로 외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을 정도로 인텔리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 사업 관계로 약 1년 동안 옥천에서 생활한 김현식은 시골 촌놈들과 싸움을 벌이며 골목대장이 됐다. 보성 중학에 전교 4등으로 입학할 만큼 총명했던 이 소년은 사촌 형 양국정 씨에게 기타를 배우게됐고 '비틀즈' 'CCR'등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만큼 그의 성적은 떨어졌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간장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모범생 김현식은 주먹질을 해대는 문제아로 변해갔다. 그는 누구에게 지는 것을 싫어해 싸움을 해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항복을 받아내곤 했다.

74년 경기 고교에 낙방한 후 명지 고교에 입학한 그는 밴드부에서 가입한다. 하지만 선배의 악기를 만진 죄로 싸움을 벌이다 1학년 말 학교를 자퇴하고 만다. 이후 그는 기타를 메고 서울 종로와 명동의 통기타 업소를 전전하며 아마추어 가수로 나섰다.

김현식의 무명시절은 그날 노래한 돈으로 하루를 사는 나날이었다. 배가 고파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고 밤무대 선배 가수들의 허드렛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서울 국도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조동진 조원익과 그룹 '동방의 빛'을 조직해 노래를 불르며 그의 노래 실력이 서서히 알려질 때까지 그런 생활은 계속됐다.

그는 80년 '망설이지 말아요' '얼굴' '봄여름가을겨울' 등을 수록한 데뷔앨범을 발표한다. 록부터 트롯까지를 아우른, 김현식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살아있는 작품이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82년 김현식은 서울 신촌의 한 의상실에서 만난 김경자 씨와 뜨겁게 사랑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듬해 아들 완제를 얻으며 그는 비로소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된다. 생계를 위해 가수 생활 외에도 서울 동부이촌동 부근에 피자가게를 열어 배달까지 도맡기도 했다.

하지만 술을 즐기고 불규칙한 밤무대 생활 때문에 그의 결혼생활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김현식이 세상을 뜨고 난 후 아들 완제는 어머니와 남동생이 살고 있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고 부인 김경자 씨는 서울 모처에서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김현식의 자작곡 '떠나가 버렸네'는 그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돌아보는 듯 하다. "그대 내 맘에서 떠나가 버렸네. 사랑을 남긴 채. 그대 내 맘에서 떠나가 버렸네. 아쉬움 남긴 채. 외로운 이 내 마음에 사랑을 남긴 채. 떠나가 버렸네. 내 맘속에 그대는."

◆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음악에 집착했던 가객

이별의 아픔을 절절한 목소리로 승화시킨 '사랑했어요'(84)를 통해 김현식은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로 거듭난다. 김종진 전태관 유재하 등과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을 조직해 발표한 '비처럼 음악처럼'(86)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30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동아기획 집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식은 '얼굴없는 가수'로 불렸다. 제대로 된 음악을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고집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언제나 라이브 공연을 고집했고 TV에는 거의 출연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대학가의 소극장에서 김현식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신촌에서 그는 '여대생의 우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87년 대마초 흡입 혐의로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구속된 그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88년 2월 서울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가진데 이어 4집 '언제나 그대 내곁에'를 선보인 그는 이듬해 '신촌 블루스' 2집과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참여하면서 건재를 과시한다. 하지만 김현식은 거듭되는 폭음으로 병원을 드나드는 생활이 이어진다.

대마초 흡입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대신 술에 더욱 집착한다. 소주 2병을 단번에 들이킬 정도였다. 그는 녹음을 하는 도중에도 술을 마셨다고 한다. 술기운으로 감정을 이끌어냈고 절규 섞인 노래를 불렀다고 할까.

그 당시를 육상효 씨는 "마약의 환각 대신 술을 찾기 시작하면서 간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마약에서 술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그는 아침이고 낮이고 언제나 술을 마셨고 취해 살았죠"라고 회상했다.

동아기획의 한 관계자는 "술을 주지 않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해서 달래도 보고 화도 내봤지만 결국은 같이 술잔을 들곤 했어요. 상태가 심할 때는 병원에 감금을 시켜놓고 음악 작업을 할 정도였지요"라고 말했다.

90년 3월 5집 앨범 '넋두리'를 낸 김현식의 음악은 '가객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고 노랫말은 어둡고 음울했다. 죽음을 스스로 감지했기 때문인지 그의 노래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리고 11월1일 오후 5시20분 경 그는 하늘로 떠났다.

5, 6집을 동시에 작업했던 89년부터 2년 동안 김현식은 몸상태가 괜찮아졌을 때만 녹음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30여곡을 만들어놓았지만 그가 죽음을 맞기 전까지 완성한(가녹음 포함) 곡은 15곡에 불과했다.

김현식의 사후에 공개된 유작앨범 '내사랑 내곁에'는 그가 죽기 직전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녹음한 곡. 듣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목소리에 힘이 떨어져 있었지만 91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선정될 만큼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 김현식 유작 '내사랑 내곁에'는 국민 가요로 남아

96년 김현식의 유작앨범이 발표됐다. 가녹음 상태여서 잡음이 가득한 사운드였지만 김광민 정원영 한상원 이호준 등 선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했고 窩瀁?박정운 등이 노래에 참여하는 등 '김현식 다시 부르기 작업'을 거들었다.

이 음반의 프로듀싱을 맡았던 송홍섭 씨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79년쯤 그를 처음 만났어요. 그 친구는 술을 먹고 나면 시비를 많이 걸었지요. 여러 번을 참다가 한번 실컷 두들겨 패줬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제게 다가와 툭 치면서 '야 술 한잔 하자'며 웃더군요. 꾸밈이 없고 돈 욕심도 없던 그런 친구였습니다. 배에 복수가 찰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됐는데도 본능적으로 노래를 불렀던 진정한 뮤지션이었지요."

가끔 비오는 날이면 그의 음악이 그리워지곤 한다. '비처럼 음악처럼' 이 그렇고 '이별의 종착역'도 그렇다. 특히 하모니카 연주곡 '한국사람'은 외로움을 많이 탔다던 그가 스산한 바람이 부는 날 낙엽을 밟으며 쓸쓸히 걸어가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김현식의 유일한 안식처는 기타였다. 그는 기타를 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아들 완재를 보았지만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가정생활 속에서 김현식은 스스로를 무너 뜨려가며 사랑노래를 불렀다.

지금 경기도 성남시 남서울 공원묘지 에덴 동산에 잠들어 있는 김현식. 오직 음악만을 생각했던 그는 강산이 한번 바뀌는 시간이 흐르며 자신의 노래 몇 곡을 남겨놓은 채 우리에게 잊혀져 가고 있다.

8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기였다. 주류에 조용필이 있었다면, 언더그라운드엔 김현식과 '들국화'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 같은 민중 가수들이 공존했다. 특히 언더그라운드 진영은 특히 앨범의 완성도와 소극장 콘서트를 통해 새로운 청중들과 교감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과 저변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지금 가요계에 언더 그라운드의 존재는 미미하다. 홍대 부근의 클럽에서 언더 록 밴드들이 활동하기는 하지만 김현식이 무대를 휘저을 당시와는 상황이 달라 보인다.

'푸른하늘' '들국화' '빛과 소금' 장필순 김현철 등을 배출했던 언더그라운드의 메카였던 동아기획도 과거의 명성이 흐려진 상태지만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김영 사장은 "김현식과 관련해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며 "김현식 같은 뮤지션을 발굴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거칠면서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했던 김현식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목소리를 가진 보컬리스트였다. '사랑했어요' '내사랑 내곁에' 등 그의 음악이 아직도 가끔씩 기억되는 것도 김현식 특유의 흡인력 있는 창법에 있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흘렀고 김현식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의 귓전을 울린다. 하지만 '추모 10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용하다. 서태지가 은퇴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가 생겼고 그 단체는 지금도 서태지의 컴백에 큰 힘이 됐던 게 사실이다.

신인가수 김범수가 10월말 발표할 2집에 김현식의 목소리가 담긴 '비처럼 음악처럼'을 컴퓨터 합성을 통해 듀엣으로 부른다고 한다. 비록 기계적인 조합이겠지만 다시금 그의 음성을 만날 수 있음은 행복한 일이다.

이런 시점에서 김현식을 기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추모 공연 같은 일회성 행사보다 그의 음악을 다시 돌아보고 그의 짧지만 치열했던 발자취를 돌아보는 자리가 만들어져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닐까?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중심에 섰던 김현식. 그의 음악이 한국 가요사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중이 다시금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음악만을 사랑했던 가객 김현식을.

고인이 세상을 등진지 10년이 흘렀건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구슬프다. 외로움을 가득 담았던 '사랑했어요'의 구절이 떠오른다.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 마음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황태훈 beetlez@donga.com

(사진제공:동아기획)-여성동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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