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가치체계의 정상에 돈이 올라앉은 상황을 맞이한 지 이미 오래다. “돈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돈이 있다”고 말은 바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돈을 위해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화폐를 만든 것은 고려조의 성종(成宗) 때였으나 금속화폐가 전국적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말엽부터였다. 우리 조상들은 사회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물물교환에 불편을 느꼈고, 그 불편을 더는 수단으로 돈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이 본래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했음을 역사가 밝혀 주는 대목이다.
우리 조상들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을 남겼다. 이 속담에는 본래 “힘들고 구질구질한 일도 회피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여 많은 돈을 벌라”는 뜻과 “열심히 일해 번 돈은 귀하고 보람 있는 일을 위해 뜻 있게 쓰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돈에 관해 매우 현명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마구 돈을 벌어서 사치와 향락을 위해 그것을 낭비하는 생활 태도를 자랑으로 여기거나 부러워한다. 저 속담 속의 ‘개같이’와 ‘정승같이’를 잘못 해석한 것일까?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크게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향락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돈을 정승같이 쓰는 길이 아니다. 즐거움을 많이 갖도록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향락을 곧바로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많은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식도락 또는 주색에 탐닉한 쾌락주의자들의 말로가 고통으로 가득 찬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보지 않았던가. 쾌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열심히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은 저절로 따라온다. 돈보다 소중하고 향락보다 값진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생명과 건강, 예술과 학문, 사랑과 봉사, 질서와 평화 등 ‘인간적 가치’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가 지극히 소중하다. 이 지극히 소중한 것들을 위해 생명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누구나 정승 부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돈이나 쾌락이 귀중하다는 것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세상에는 돈이나 향락보다 더욱 귀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할 따름이다. 가치 체계의 정상을 차지해야 마땅한 ‘인간적 가치’가 그 자리를 돈과 향락에 빼앗기고 숨을 죽이고 있음에 현대 문명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
가장 자랑스러운 사람은 돈과 소비생활에서 앞선 사람이 아니라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다. 가장 자랑스러운 국가는 경제력과 무력에서 앞선 나라가 아니라 건강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이룩한 나라다. 다만 개인으로서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가꾸기 위해서나 국가로서 강한 경제력과 무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돈을 벌어야 하는 까닭에, 우리는 수출의 증대와 ‘국가 경쟁력’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수출의 증대와 국가 경쟁력이 우리들의 궁극 목적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유교 사상가들이 천지 만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귀중함을 역설했고,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이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소중함을 거듭 강조해 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신분과 계급을 따라서 사람을 차별했던 시대에도, 인간적 가치를 귀중하게 여기는 전통을 세워 왔다. 그러나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계기로 상업주의가 세계를 풍미하게 되면서 금전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 그리고 뒤늦게 ‘근대화’를 서두른 우리나라는, 비판이나 성찰의 겨를도 없이, 이 거센 파도에 휘말렸다.
거듭 강조지만, 인간적 가치를 본래의 자리로 올려놓아야 한다. 인간적 가치의 근간은 우리들의 가치관이요, 그 핵심은 윤리의식이다. 건전한 가치관과 높은 윤리의식 없이는 경제발전도 어려우며 수출 경쟁력에서도 밀리게 된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나라는 우선 경제력을 크게 강화해야 하지만, 경제력의 강화를 위해서도 건전한 가치관이 필수적이며, 강화된 경제력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가치가 제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
김태길(학술원 회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