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일본 소니사는 경쟁사인 마쓰시타로부터 VCR을 공동 개발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과감하게 뿌리쳤다. 소니는 이후 획기적인 성능을 가진 베타맥스 방식의 VCR을 독자적으로 시장에 선보이면서 가정용 비디오 시대를 열었다. 자신이 개발한 VCR의 성능을 과신했던 소니는 히타치와 미국 RCA가 자기네 상표를 붙여 납품해달라는 요청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쓰시타는 할 수 없이 독자적으로 VHS 방식의 VCR을 내놓고 히타치와 RCA를 끌어들여 생산에 들어갔다. VHS 방식은 베타 방식에 비해 기술적으로 뒤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장 지배력이 큰 업체들이 줄줄이 VHS 진영에 합류하면서 소니를 압도했다. 소비자들이 베타맥스 방식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시장에서 도태되고 말았다.
소비자들은 제품설명서에 기술적 우수성을 잔뜩 적어놓은 베타 방식보다 오히려 VHS 방식을 선호했다. VHS는 기술에서는 뒤졌을지 모르지만 베타보다 3배나 긴 3시간을 녹화할 수 있었기 때문. 기술이 아닌 시장이 표준을 결정하게 된 대표적인 경우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소니와 마쓰시타는 디지털 가전제품을 서로 연결하는 플래시메모리 카드 분야에서 다시 한번 표준 경쟁을 벌이고 있다. 플래시 메모리 카드는 대용량의 데이터를 손톱만한 칩에 저장해 PC와 각종 디지털기기 사이에서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데 사용하는 부품. 예를 들면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PC로 옮기거나 PC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받은 MP3 음악 파일을 휴대용 MP3 플레이어로 옮기는 데 사용한다.
공교롭게도 상황은 20여년 전과 비슷하다. 소니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메모리 스틱을 내세우고 있는 반면 마쓰시타는 미국 산디스크가 개발한 SD카드를 선택했다. 마쓰시타 진영에는 당시처럼 100여개가 넘는 업체들이 연합군으로 포진하고 있다.
숫적으로는 열세지만 이번에도 소니는 자신만만하다. 디지털 캠코더, MP3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노트북 컴퓨터 등 메모리 스틱을 사용하는 개별 기기마다 소니 제품은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쓰시타측은 참여 기업이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니 제품이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소비자들이 가정에서 쓰는 모든 제품을 소니 브랜드로 구입하지 않는 한 연합군을 이길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과연 소니는 20년전의 패배를 설욕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이 다시 마쓰시타 연합군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제2의 ‘베타 vs VHS’ 경쟁에 세계의 이목이 쏠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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