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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곽중철/통역은 神과 싸우는 일

입력 | 2000-11-01 19:08:00


1979년 설립된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에 1기 학생으로 입학해 통역계에 뛰어든 지 21년 째 되던 8월. 서울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준비기획단으로부터 회의 동시통역을 총괄하는 조정관 임무를 공식 부여받았다.

26개국 정상들의 토론을 16개 언어로 동시통역해야 하는 임무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통역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는데 큰 문제 없이 끝난 것이다.

이번 서울 ASEM을 위해 유럽연합(EU) 소속의 11개 언어 통역사 37명이 브뤼셀에서 날아왔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일본에서 각 6명, 태국에서 3명, 베트남에서 2명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6명의 여성 통역사가 투입됐는데 이들은 모두 통역대학원을 나와 대학에서 통역강의를 맡고 있는 최고의 재원들이다. 또 16개 언어를 동시에 중계 통역할 수 있는 덴마크제 통역장비를 들여오기도 했다. 통역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이같은 전문통역사들의 노력과 최첨단 디지털 장비의 도움이 컸다.

이번 서울 ASEM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인간이 갖가지 언어를 쓰게 된 것이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처럼 신의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새삼 들었다. 쟁쟁한 국가의 정상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에 서로 의사를 전달하는 데 그 많은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서로 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있다고 해도 자국의 위신과 주권이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통역을 고집해 그 많은 인력과 예산을 써야 하다니…. 필자도 통역사이지만 이번에 모인 57명의 통역사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은 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인가, 아니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인가’ 하고 자문해 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필자는 통역을 강의하다가 학생들이 힘들어하면 “신이 금지한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신에 거역하는 일이기에 당연히 어렵다”는 말로 달래고 격려하곤 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통역사는 만들어지기보다 태어난다’고 믿는 편이다. 통역사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교육받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만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조리 있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환경에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급 통역사들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 이번 ASEM만 하더라도 하루 500달러 가량의 통역료를 받는 것 외에도 정상들이 묵는 호텔에서 독방을 쓰면서 청와대 경호실에서 발급하는 붉은 딱지의 최고급 통행카드를 발급받았다. 아무리 무서운 경호원이라도 통역사들을 제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최종 경호선을 무사 통과해 어두운 통역부스에 앉아 조용히 ‘금지된 장난’ 같은 통역 임무를 수행하고 또 조용히 사라진다. 자신이 원하면 여유 있는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통역해야 할 언어의 수가 늘어날수록 통역사의 수와 그들의 수입은 더욱 늘어갈 것이다.

그런 고급 통역사들은 완벽한 통역을 하는 데 필요한 요구사항도 많다. 이번 회의에서도 EU의 수석통역사는 정상회담장보다 통역부스의 온도가 높으니 부스에는 별도 냉방을 해달라고 요청해 끝내 관철시켰다. 그는 “통역은 입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더우면 안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제 16개 언어의 동시통역이라는 우리 사상 초유의 임무는 끝났다. 당분간 우리에게 이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동시통역은 없을 것이다. 몇 년 후 30개가 넘는 말을 통역해야 할 행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을 찾을 수 있을까? 필자는 이에 대해 비관적이다.

통역이란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며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을 금지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인 만큼 신이 그런 묘책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최첨단 기술과 장비를 동원해도 내일의 날씨를 정확히 예보할 수 없는 것처럼….

곽중철(한국외대 통역대학원 교수·통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