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 박범신 지음 288쪽 7500원 창작과비평사
박범신의 신작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는 그가 ‘흰 소를 끄는 수레’에서 보여주었던 문학에 대한 순정한 자기 성찰이 이제 다채로운 문학적 관심으로 본격적으로 개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문학적 증표이다.
이른바 절필 선언 이후 3년여만에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던 그가 소망했던 바, 즉 “저를 작가로 다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지껏 ‘작가’라는 이름보다 더 떨리는 성찬을 받아본 적도 없고, 다른 명패를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문학동네 1996년 가을호)라는 바램은 처절한 자기 응시의 단계를 거쳐 이제 성숙하고 탄탄한 미학적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다채로운 소설기법과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 기법은 ‘들길’ 연작(그해 가장 길었던 하루, 손님)을 관류하는 전통적인 리얼리즘 기법에서부터 ‘세상의 바깥’에서 채용된 환상적 리얼리즘, 혹은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에까지 걸쳐 있다.
그 사이에 등장인물의 다양한 시점에서 현실을 재치 있게 묘사한 풍자(소음)와 재판장에게 들려주는 자기 고백(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자신을 몰래 엿보는 타자를 탐문하는 추리소설 형식의 탐색담(별똥별) 등등의 기법이 박혀 있다.
한마디로 이 소설집은 같은 작가가 썼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다성성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작가 박범신이 자신이 그 동안 온축해오고 있었던 문학적 재능과 기법을 의욕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내용면에서 보자면, 이번 소설집은 타자와 사회와의 만남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내면과 글쓰기에 대한 모색에서 탈피하여 이 사회 곳곳의 환부와 세태, 풍경, 그리고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한 시대(1940년대)에 대한 증언에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 기타는 죄가 많아요’라는 작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소설가 자신을 화자로 등장시킨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흰 소를 끄는 수레’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주인공과 기묘한 연관을 맺었던 우대산이라는 특이한 인물을 대한 묘사를 통해, 진실과 허위가 혼동되는 세태의 모순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흰 소…’의 세계와 변별된다. 사실상 이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우대산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박범신이 90년대 문학의 내면화 경향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하는 대목은 이번 소설집이 지닌 맥락과 의미를 효과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박범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내면을 철저히 들여다본 사람만이 사회와 타자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고. 그의 시선이 지속적으로 머물 ‘들길’ 연작에 주목해야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권성우 (문학평론가·동덕여대 교수)